광복 후, 중학교와 교회에서 지도력 훈련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왔다. 한반도는 감격스런 해방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 해 그의 형이 19살에 결혼했는데 이듬해 그만 병으로 유복자를 남기고 소천했다. 이제 그는 졸지에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불러 앉혔다.

“나는 땅을 갈아먹고 사는 농부지만, 너만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공부가 소원이던 차 아버지의 허락을 받자마자, 기뻐서 문 전도사에게 뛰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문 전도사가 그의 공부와 미래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 줬다.

그는 이듬해 2월에, 난생처음 아버지를 따라 기선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 선망의 땅인 목포로 갔다. 그는 친척집에서 하숙하며 문태중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당시 목포의 유일한 성결교회인 북교동교회에 가서 등록했다.

당시 담임은 천세광 목사였다. 그러나 이듬해 천 목사가 천안교회로 가고, 이성봉 목사가 부임했다. 이만신 학생은 이 목사님이 어렸을 때 고향교회에 와서 말씀 전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이성봉 목사를 닮기 위해 설교를 노트에 받아 적고, 부르는 찬송도 열심히 따라 불렀는데, 이성봉 목사도 그에게 장차 목사가 되라고 격려하고 계속 기도해 주었다.

그러나 1949년에 이성봉 목사가 전국성결교회 부흥사로 임명되어 떠난 후, 후임으로 서울에서 30대 김동완 목사가 부임했다. 이만신 학생은 김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봉사했다. 또 처음으로 학생회가 조직돼 그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된지 겨우 2년, 그가 5학년 1학기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공산당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3개월 후 아군에 의해 남한국토가 회복되자, 그는 복교해 신설된 학도호국단의 대대장에 선출됐다. 그는 매일 조회 때마다 전교생에게 구령을 불러 통솔했고 중요행사 때마다 시가행진을 지휘하는 등 리더십을 길렀다.

생애 최고의 선택- 서울신학교 입학
그가 1952년 고교를 졸업하자, 큰 고민이 생겼다. 그의 소원이 이성봉 목사 같은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이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상대나 법대에 진학해 출세하기를 원했다. 그는 날마다 엎드려 기도했지만, 어머니의 평생기도도, 또 자기가 꼭 되고 싶은 것도 이성봉 목사 같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는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모든 서류를 준비한 후, 부친의 승낙 없이 1952년 4월에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가서 금정산을 묻고 물어 찾아가 입학시험을 친 후, 입학하는 결단을 보였다. 서울신학교는 1911년에 세운 성결교회 교역자양성기관으로 당시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정부를 따라 부산으로 피난 가 동래온천 금정산 기슭에서 피난 신학교로 임시 개교 중이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동양선교회가 고난당한 한국인을 위해 한국 선교활동을 재개해 많은 구호품으로 봉사했다. 그 덕에 신학교가 금정산 기슭에 터를 잡고 대형 천막을 친 후, 나무로 긴 책상 겸 식탁을 만들어 학생들은 빵과 옥수수 죽으로 숙식을 해결했다. 1953년 7월 휴전 되자, 정부가 8월에 상경하고, 서울신학교는 이듬해 3월에 서울로 복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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