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3학년 때 첫 목회와 군목입대

황대식은 3학년 때 1953년 7월 전쟁이 휴전 되었으므로 이듬해 서울 아현동 신학교로 복교했다.

그는 고향교회 목사의 간청으로 예산읍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을 섰다. 예산읍교회는 일제치하인 1932년에 창립되었으나 1943년에 일제의 전국 성결교회 해산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가 1953년 김만효 여전도사에 의해 한상윤 씨 댁에서 재건예배를 드림으로 재건되었다.

하지만 여전도사의 힘으로 개척교회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웃 삽교교회의 이 목사의 권면에 따라 신학생인 황대식이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설교하고 다시 월요일에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방학 때는 이곳에 상주하면서 심방과 설교를 병행했는데 점점 신자들이 증가되어 가자 그는 목회의 보람을 느꼈다.

그는 1955년 졸업과 동시에 군목으로 입대하게 되어 예산교회를 사임했다. 그는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0주간 장교 기초훈련을 받은 후 군종장교 교육을 4주간 받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첫 발령지 육군 27사단 78연대에 부임하여 연대교회당을 건축했다. 전방부대여서 건축공사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사단장 김계원 장군이 진실한 크리스천이어서 그의 협조가 매우 컸다.

그가 유명한 이성봉 목사를 모시고 교회 신축기념 부흥성회를 할 때 전기가 없는데도 사단장의 특명으로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켰고, 또 특별찬송 때는 사단군악대가 동원되어 찬양도 했다. 사단장이 앞장서서 매일 저녁집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부하 장교들도 따라 나와 전 사단적인 대집회로 큰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2년 후 전후방 교체에 따라 대전의 병참재생창 군목으로 전임했을 때 난감했다. 예배당도 없고 군목이 한 번도 시무한 적이 없던 곳이라 생소했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일해서 예배당을 하나 만들어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육군 병참감이 이곳에 초도순시를 왔는데, 병참감이 다름아닌 김계원 장군이어서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며 반가워했다. 김 장군이 떠나면서 대전 병참재생창 사령관에게 “황 군목은 훌륭한 사람이니 하는 일에 잘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이곳에서도 그의 군목활동은 활발했다.

하지만 그가 군목생활을 하던 중 군목의 세계에서도 진급을 위한 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만 군목생활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군목 동기(9기)생 중에서 가장 먼저 예편을 지망했다. 그때가 군목생활 4년째인 1959년이었다.

그러던 차 서울신학교 동기인 이용신 목사의 소개로 충주교회 여전도사가 대전에 찾아와 자기교회에 부임해 달라고 청원을 했다. 그는 아직 예편도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그런데 토요일이 되자 그는 갑자기 충주교회가 궁금하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급히 잘 아는 전도사에게 대전 군인교회 주일예배를 인도하게 한 후, 충주로 갔다. 당시 충주교회는 창고를 사서 예배를 드리는 개척교회였지만 신자들 20여 명이 열심히 모였다.

그는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왔지만 다음 주일이 되자 또 궁금해져서 내려가 또 예배를 인도했다. 이렇게 연 3번 찾아가 예배를 인도한 후 4번 째 주일에는 아예 부임해 버렸다. 그의 전역은 신청한지 6개월 후에야 허락이 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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