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재건과 납북

이종무 목사
박형규 목사는 1939년에 개성교회의 주임으로 파송되어 일등벽돌로 예배당을 아담하게 새로 건축했다. 개성교회는 1909년 성결교회가 세 번째로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다. 일본제국이 1943년 5월 24일에 성결교회예배금지령, 9월에 폐쇄령을 내렸다.

박 목사는 서울로 압송되어 이명직 목사 등 11명과 같이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박 목사 가정은 기초생계마저 막막해져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사모 김은실 전도사가 고구마 잎을 주워서 삶아먹다가 부황이 생겨서 자녀들의 얼굴이 부어올라 학교를 보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박 목사가 선교사가 경영하는 개성명덕고등학교 교목과 사감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생계가 안정되었다.

1945년 개성에서 8·15해방을 맞자 박 목사는 당장 일장기를 떼어서 태극기로 개조하여 온종일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박 목사는 성결교단을 재건해야한다며 명덕학교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9월 9일 성결교단이 재건되면서 경성신학교도 재건하기로 결정되어 교장에 이건 목사를 선임하고 박 목사는 신학교유지재단 총무로 선임되었다. 총회에서는 신학교유지를 위한 특별헌금을 결정하고 3000명 유지회원 모금운동을 했다.

박 목사는 신학교완전재단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 교회를 다니면서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성지 집사가 트럭 2대로 회사 성운사를 운영하여 이익의 전부를 신학교 운영경비로 헌납하고 개성평안주물공장 경영자 이재홍 씨의 신학교 수리비 5000원과 매월 2000원 지원과 개성십자병원장 최창현의 3000원 성금 등을 기초로 경성신학교유지회를 조직했다. 그 후 재흥수양회에서 11만 원의 헌금과 매월 3000원의 유지헌금이 확보되었고 성금이 계속 답지했다.

박 목사는 경성신학교교수 겸 사감으로서 학생들에게 성서를 가르쳤고 경건훈련을 지도했다. 박 목사는 문필가로 ‘활천’에 설교, 전기, 방문기, 시, 목회기 등의 글을 남겨놓았다. 그는 8·15광복 후에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때마다 김유연 목사가 칭찬과 격려를 해줬다.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군은 경성신학교와 사택을 점령했다. 박 목사 가족은 대현교회로 거처를 옮겨서 은거했다. 박 목사는 공산치하에서도 허름한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 뒤에다가 삼베옷감을 조금 싣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전도했다.

박 목사는 박현명, 이건, 김유연, 최석모 목사가 궐기대회를 위해 내무소로 불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가족과 사모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강력히 만류했지만, “어떻게 나 하나만 집에서 가만히 있겠느냐?”하면서 나갔다. 박 목사는 황성택 목사의 집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공산당에게 연행되어 갔다. 그것이 막내딸 종우 씨와의 마지막 작별이 된 것이다. 박형규 목사는 8월 10일 성결교단 6명의 지도자와 함께 납북되었다.

성결교단은 이때 납북된 여섯 분, 이건 박현명 최석모 김유연 박형규 유세근 목사를 순교자로 결의하여 2003년 6월 23일 옛 서울신학대학교 대강당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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