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한 가족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이 극단적으로 치달아가던 1931년 4월 3일, 이원기는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소산리 짝바우라는 시골 동네에서 본이 진안 이씨인 아버지 이종갑과 어머니 송신애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배가 불러올 때에 아들을 낳는다면 목회자로 바치겠다고 서원했는데 그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꿈을 전날 밤에 꾸고 아침에 진통이 오기 시작하여 그를 출산하였다.

그의 집안은 친조모, 외조모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초창기인 1880년대에 황해도 출신 서상륜 등이 북경에서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로즈)을 몰래 가져와 서북부지역에서부터 복음을 전한 덕분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이었으며 주변의 친척들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랄 수 있었으며, 교회는 읍내에 있는 곽산장로교회를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다녔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공산당들의 마수가 북한 전 지역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원기는 평동노회에서 설립한 평동중학교를 다녔다. 공산주의자들의 잔학함으로 사회분위기가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험악해지자, 제일 먼저 기독교인들부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원기의 가족은 서울에서 광산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한 달 동안 준비한 그의 가족들은 평양 가는 표를 끊고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해서 사흘 만에 도착하였다. 화물칸에 탄 사람들은 장사꾼들과 월남하려고 하는 피난민들이었다. 월남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평양에 도착한 그의 가족들은 다시 해주까지 가는데 중화에서 한 번 조사를 심하게 받았다. 해주에 내린 그의 가족들은 “서울에 가려고 그러지요?” 하면서 접근하는 안내자를 만나 인도를 받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북한 보안서원들이 이남으로 내려가려는 의도를 이미 알아채고 붙잡으려 하는 각본이었다.

조금 있으니까 보안서원들이 들이닥쳐 그의 가족은 해주보안서로 끌려갔다. 이미 그곳에는 월남하려다 붙잡혀 온 사람들 300여 명이 갇혀있었다. 

왜 이남에 가는지를 묻는 보안서 취조관의 취조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들 아버지가 서울에서 광산을 하는데 38선이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합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삽니까? 애들도 아버지를 찾고 해서, 애들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있는 돈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옷 속에 감춘 돈을 다 꺼내놓으니 돈이 꽤나 많았다. 돈을 빼앗긴다면 무슨 수로 서울에 갈 수 있을까? 걱정하다 속으로 기도했다.

이 때 보안서 서장이 “이것 참 사람이 할 짓이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월남하지 말고 정주로 다시 돌아가라고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청단 수용소를 거쳐 고생 끝에 서울행 기차를 겨우 타고 종로구 명륜동에 도착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명륜동에서 아버지를 만나, 서로 얼싸안으며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 사실에 감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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