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죽도록 충성다짐

강신찬 목사가 강릉에서 2km 떨어진 농촌마을 신석교회에 시무하는 여전도사의 아이가 잘못됐다는 전갈을 받고 가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잃은 여전도사가 측은하고 이 일로 인해 마을 전도의 문이 막힐 것 같아 착잡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떠올리게 하셨다. 강신찬 목사는 여전도사와 여집사를 밖으로 내보낸 후 아이를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이곳에 복음의 문이 닫히지 않게 해주옵소서. 저 가련한 여인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옵소서. 필요하면 제 생명으로 대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당신께서 나를 택하셨다면 그 증거로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다.

그러자 품에 안긴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소리쳐 밖에 있는 이들을 들어오라고 하여 아이를 여전도사에게 주었다. 여전도사가 눈물범벅이 되어 무릎 꿇고 “전도사님, 이 아이는 강 전도사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강 목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생 죽도록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이 놀라운 기적을 일체 말하지 않도록 단속했다.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그의 목회에는 사고와 문제 있는 교회와 인연이 하나님의 섭리로 느껴졌다. 시험에 빠진 삼척교회로 부임해 수습하고 나니 예배처소가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신기한 꿈을 꿨다.

일본인이 살던 집을 사서 교회로 아름답게 개조하니 강대상 양쪽에 황금촛대가 있고 십자가가 찬란하게 빛났다. 흰옷 입은 성도들이 찬송하며 옆문과 앞문으로 줄지어 끊임없이 들어가는 광경이었다. 잠에서 깬 후 강 전도사는 삼척교회 부흥발전과 일생목회에 대한 확신이 섰다. 그는 무릎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날이 새자 마을 뒤쪽에 꿈에 본 집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 매물로 나와 있던 터라 25만 원에 구입해 개축하니 넉넉한 예배처소가 되었다.

이후 1966년에는 강릉교회의 주임 교역자로 부임했는데 폐결핵이 깊어져 체중이 50kg 미만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강릉교회는 각혈과 기침하는 그를 배척하지 않고 목회하도록 배려한 고마운 교회였다. 의사는 조용히 집에서 쇠고기나 많이 먹으라고 했지만 그는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목회사역에 생명을 내걸고 더욱 최선을 다했다.

강 목사는 깊은 기도생활에서 우러나는 영적인 모본과 권위로 목양했다.

그의 설교는 늘 영적 생동감이 넘쳤으며 회개와 영혼구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또한 교회 사랑과 섬김의 생활을 특히 강조했다. 이런 그의 목회철학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강릉성결교회사에 보면 강신찬 목사를 ‘영적으로 버림받은 자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주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행동하는 목회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부임한지 5년째에 강릉교회는 정식 당회가 구성되고 직원회가 활성화되어 인적·재정 자립이 이루어졌다. 특히 복음전파와 지역사회 봉사에 활력이 넘치는 교회로 부흥 성장했다. 강릉교회는 교단 창립 60주년 기념 배가전도에 적극 호응해 ‘배가 위한 기도’, ‘전도, 춘추부흥회’ 등을 실천해 실제 배가 부흥을 이루었다.

이후 적극적 봉사와 선교, 성가대 활성화, 학생부흥운동을 통해 유능한 목회자 등 좋은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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