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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는 1948년 6월 초에 함흥에서 한국의 최북단 아오지탄광 오봉(梧鳳)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사상범 일행 20여 명이 입소하는 날 각처에서 잡범들이 많이 들어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죄수 수천 명이 수용되었다. 죄수들은 주야 3교대로 쉴 사이 없이 석탄 캐는 중노동을 했다.김 목사는 평양감방에 같이 있던 죄수들이 있는 방으로 배치되었다. 김 목사는 이야기 잘하는 목사로 소문이 나서 죄수로 조직된 자치위원회 경비반장들이 매일 와서 이야기 그에게 듣기를 즐겼다.탄광 내의 오락 시간만 되면 김 목사를 청하여 전도 강연 듣기를 좋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산돌교회 원로)
2022.03.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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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세계 제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소련군이 만주대륙에 진주했다. 진주한 날부터 만주대륙이 큰 혼란에 빠졌다.방화 살인 폭행 등의 만행이 날이 갈수록 심해서 도저히 안심하고 살 수 없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그해 10월에 봉천(선양)을 떠나 구사일생으로 평양에 와서 대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곧 열린다는 38선 개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동교회는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다가 재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도가 3명에 불과했다. 김 목사가 유년과 장년 부흥회를 열고 금식하며 철야 기도회를 진행한 결과 큰 성황을 이뤘다. 신도가 80명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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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산돌교회 원로)
2022.02.1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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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순 목사는 김진한 계장이 김 목사에게 성경과 서적을 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성경을 다시 압수당할 것을 생각하여 마태복음 5~7장을 암송한 다음 빌립보서와 요한계시록, 데살로니가전서 전부를 암송했다.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차고 넘치니 걱정 근심이 있을 수 없었다. 목사들이 주일 작업을 거부했다고 하여 악질 목사로 몰아 한 방에 몰아넣고 3.1운동 당시 순사였던 반역자 2인을 같이 있게 한 후에 우리 방을 악질 방이라고 불렀다. 각 기관에서 ‘악질 방’을 찾아와 묻는다.“무슨 죄로 들어왔소?” “나는 모르는데 반동 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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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산돌교회 원로)
2022.02.1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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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순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할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했다.평안남도 강서경찰서 유치장에 20여 일을 있는 동안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전혀 기도와 성경 보는 시간으로 보냈으니 이런 기회는 평생 처음이었다.가졌던 성경을 압수당했으나 집사람과 아이가 면회를 와서 서장에게 특별교섭하여 신약성경을 받게 되었다.심문이 끝나서 평양으로 넘어가게 되면 성경을 빼앗길 것을 예상하고 야고보서를 암송하여 머릿속에 저장했다.4월 중순, 강서에 유치된 지 20여 일 만에 심문을 마치고 검찰청으로 넘겨 평양 교도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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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산돌교회 원로)
2022.02.0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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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순 목사(1906.5.16~1980.10.8)는 북한 공산당의 모진 고문과 희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굽힘이 없이, 목숨 걸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선전 분투한 복음 사역의 승리자다.그는 공산당에 의해 악질 반동분자가 되었고, 강서보안서, 평양교화소, 진남포교화소, 함북 본궁교화소, 함흥교화소, 아오지탄광 정치범수용소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2년 동안 중노동에 시달렸다.그는 출옥 후에도 북한에서 철통 감시, 불안 조성, 위협 등 공포의 생지옥 가운데도 믿음을 굳게 지키다가 1950년 4월 13일 탈북하여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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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산돌교회 원로)
2022.01.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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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척교회 사역 마치고, 당진 중앙성결교회 개척 해창교회를 개척할 성전대지에서 바로 보이는 산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400~500년이 되는 나무 큰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산당 지붕 안에 제사상과 촛대가 있었다.전도에 열심 있는 청년과 주민 12명을 모이게 하고 어느 날 나무를 준비하여 자정에 불을 질러 세 시간 만에 완전히 산당은 타버렸다.그리고 1965년 6월 1일부터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 정성어린 성도들의 헌금과 세계구호위원회 보조로 벽돌을 찍어 한달 만에 외부 공사는 마쳤다.아직 내부공사는 못 하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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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10.2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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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성결교회 개척과 장로 장립 주일이면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 초신자 집에서나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렸으나, 사람들이 많아지자, 장소가 좁아 소난지도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그런데 학교에서 예배드리는 일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소난지도에서 대난지도감리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3명 있었는데, 그들이 방해하기 위해 공공건물에서 예배드릴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어느 날 감리교회 목사와 청년 30명이 왔다. “교회도 의리와 질서가 있는 법인데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선교하는 것이요?” 바울사도의 말을 빌려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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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10.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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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철은 이제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어 날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며 기도했다.며칠 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세밀한 음성을 들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기도와 성경 연구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1962년 12월의 어느 날, 그날따라 함박눈이 퍼부어 해창까지 가려면 걸어서 4시간이 걸리기에 난감했다.아내는 “눈이나 그치거든 떠나세요”라고 권면했으나 “아니야, 오늘이 지나면 내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 지금 가야 한다”고 이완철 집사는 담대하게 말했다.한때는 온 가족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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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
2021.10.0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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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삼환농장에서 일하던 11년 만에 포도밭 농장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향의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 포도밭을 매각하고 고향 서산으로 돌아와 인지면에 있는 과수원 7,000평을 매입했다. 부모님을 자주 뵙고 또 과수원 주인으로 마음이 뿌듯했다.또 지방 유지가 되어 의용소방소 대장으로 임명받아 지역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그는 유지들과 같이 피난을 떠났다.아내는 남편 대신 농장을 지켰는데 과수원에서 나온 복숭아와 포도 등 모든 것을 인민군들이 싹 쓸어갔다.그뿐 아니라 공산당이 수시로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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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09.2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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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철은 1915년 3월 15일 부친 이종근 씨와 모친 김정자 사이에 5남 4녀 중 3남으로 충남 서산군 부석면 마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이경우였다.그의 부친은 조선 말기 관리로 강화부정족산성 사고(史庫)를 관리하는 참봉 벼슬을 하다가 한일합방으로 인해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로 보낸 후, 나라 잃은 슬픔에 통탄하고 충남 서산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냈다.부친이 충남 서산으로 내려온 후 서산에서 태어난 이경우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문학습을 배우고 부석공립보통학교를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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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남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21.09.1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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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오시옵소서! 김기삼은 구치감으로 옮겼다. 구치감은 경찰서 유치장보다는 고요하고 깨끗하여 성경 읽고 기도와 명상의 자유가 있었다.다다미 두 장 까는 방에 물도 자유롭게 쓰고 햇볕도 잘 들었다. 이발 목욕도 시켜줬다. 그런데 이발소에 갔을 때 사카다 목사를 만나 서로 문안하다가 지옥 사자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구치감은 미결수의 감방이라 매일 운동도 시키고 돈이 있으면 사식과 기타 음식물도 살 수 있었다. 보통은 한 공기 정도의 3등 밥을 주는데 인단 봉지를 만들면 4등 밥을 준다.그래서 인단 봉지 작업을 하다가 인단 봉지 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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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1.07.1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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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조관 압도한 답변 김기삼 목사는 사흘째 또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오늘은 또 무슨 고문이 있을는지….“주여, 오늘 나에게 임하는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이시이가 갑자기 “이 신분증이 기억이 나는가?” 하며 눈을 부라린다.18년 전 여름철에 3개월간 동아일보사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수재민에게 구호금을 나눠줄 때 사용하던 무임승차권이었다. 이런 신분증이 있음에도 그 경력을 뺏다는 것과 동아일보는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신문이고 기자는 다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라고 하며 위협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또 네 교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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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1.06.3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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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절규 형사들은 내 머리와 수염이 긴 것을 보고 너무 험상이 궂어 앞에 놓고 심문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이발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 단골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주며 우대한다.‘이놈들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든다. 6월 1일에 다시 특고실로 불려갔다.내 삭발한 모습을 보고 “목사가 중이 되었군” 하면서 자서전을 쓰라고 양면 괘지와 연필을 준다.자서전을 쓰는데 무엇인가 속에 뭉클하는 것이 있었다. 나에게는 3.1운동 당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1년 반이나 부산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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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21.06.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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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혹시 김기감 목사를 유치해 놓고 잊었는가 싶더니 4월 7일 간수가 비로소 김 목사를 불러내며 “너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며 빙그레 웃는다.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밖에 나가니 중년 신사 차림의 형사가 김 목사에게 “그동안 퍽 고달팠지요?” 하며 특고실(特高室)로 인도한다.한쪽 테이블 위에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다. 굶주린 판에 달게 먹고 나니 밥값은 당신이 맡겨놓은 돈에서 지출하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경찰서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산책하도록 한다.그들이 김 목사를 50일 가까이 가둬둔 것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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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2021.06.0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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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28일 새벽 먼동이 막 틀 무렵이다. “문 열어라” 소리와 함께 형사 5명이 김 목사가 목회하는 대판 성결교회를 습격해 왔다.두 형사는 2층 목사관으로 올라와서 김 목사를 붙들어 앉혔다. 한 형사는 김 목사의 책장과 책상, 벽장문을 열어 닥치는 대로 뒤졌다.세 형사는 예배당에 들어가 흙발로 강단 기도실을 수색했다. 그들은 설교 노트와 서류를 한 뭉치로 묶었다. “너는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더냐?” 묻는다. “내가 생각하기보다 늦기는 하나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이미 1941년 6월에 김 목사가 속해 있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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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1.06.0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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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목사(1901-1965)는 부산 동래 출생으로.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예과를 수료한 지성인으로 1918년 고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3‧1만세 운동 참여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 쓴 글이 우수하여 일인 교장 이께다의 소개서를 들고 당시 경성일보 편집국장을 만나러 상경했다.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견습기자로 임명되자 낙심하여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찾아온 고향 친구 박문희 전도사를 만나, 성서학원에 입학하면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미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21.05.27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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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구 목사는 1972년(51세)에 도미하여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 대학원(M. Div)을 졸업한 후, 1976년에 산호세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다. 근처에 성결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불을 뿜는 듯한 그의 설교에 은혜에 갈급한 영혼들이 모여들었고, 수년 만에 교회 건물을 매입하였다.그가 은퇴하기까지 15년 동안 20여 명의 청년들이 은혜와 사명 받아 목회자로 헌신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등 미주성결교회의 확장에 일조하였다.또 그의 목회 중 국제성결대학 이사장과 학장까지 역임하여 성결한 목사들을 양성하였으며, 1990년 미주성결교회 제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3.3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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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사감으로 신학생들 변화시키다 1961년은 성결교회 분열의 해였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50년 6.25전쟁을 치룬 한국교회는 반공사상에 철저했는데, 당시 미국은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이어서 자유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장로교, 감리교 목사들이 귀국한 후 한국교회는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로교회 총회에서 기독교장로회가 1954년 분열되어 나갔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자유파들이 기독교연합회(NCC)를 장악하게 되자, NCC탈퇴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1959년에는 다시 장로교회가 크게 다투다가 보수파는 합동 교단, 진보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3.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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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구는 1948년 서울 영천 나사렛교회의 전도사로 청빙되어 일하다가 성결교회 신학교가 아현동 언덕에 있음을 알고 1949년 서울신학교에 응시, 이건 교장이 면접고사에서 그의 중생 성결을 체험한 고백을 듣고 그를 껴안고 환영한다고 하자 역시 성결교회는 다르다고 감동 받았다.그가 2학년 때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 학교가 휴교하자 학생들은 고향이나 섬기는 교회로 갔다.그도 고향에 갔지만 7월 중순에 인민군이 들어와 토박이 빨갱이들이 설쳐대므로 숨어 지냈는데 어느 날 초등학생 제자가 멀리 도망가라고 해서 다른 군으로 도망갔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3.1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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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 기습폭격으로 유발된 태평양전쟁으로 일본 사회는 전시상태가 되어 불안했다. 성령충만을 받은 김태구는 속히 돌아가 동포에게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이듬해 봄에 선박을 타고 목포항에 귀국, 곧 고향으로 갔다.고향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시상황으로 조선총독부는 군수물자를 위해 전국 농민들을 전보다 더욱 심한 공출로 닦달해 모두 울상이었다. 그런 중에 환히 웃는 얼굴로 귀국한 태구를 보며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와 반갑게 맞았으나 그의 영적 변화와 인자한 미소에 놀랄 뿐이었다.그는 속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장)
2021.03.04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