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척교회 사역 마치고, 당진 중앙성결교회 개척 해창교회를 개척할 성전대지에서 바로 보이는 산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400~500년이 되는 나무 큰 기둥이 하나 서 있었다. 산당 지붕 안에 제사상과 촛대가 있었다.

전도에 열심 있는 청년과 주민 12명을 모이게 하고 어느 날 나무를 준비하여 자정에 불을 질러 세 시간 만에 완전히 산당은 타버렸다.

그리고 1965년 6월 1일부터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 정성어린 성도들의 헌금과 세계구호위원회 보조로 벽돌을 찍어 한달 만에 외부 공사는 마쳤다.

아직 내부공사는 못 하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동년 7월 4일 입당 예배를 먼저 드리면서 내부공사도 완공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날마다 부흥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1967년 7월 7일 52세로 해창성결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완철 장로는 신유·은사까지 받아 병든 자에게 기도하면 치유되었다.

소난지도교회와 해창교회를 오가며 교회를 돌보다 후임 목회자를 청빙한 후, 6년 동안 온 힘을 다 기울였던 개척교회의 목회를 다 주님께 맡기고 1969년 1월 1일 모교회인 당진성결교회로 돌아왔다.

모교회로 돌아와 보니 목회자와 성도들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목사님이 성도들과 화합을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되어 몇 년간 괴로움으로 당진성결교회의 성도들은 “목사님이 떠나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목사님은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다른 교파로 뿔뿔이 흩어지려는 위험한 상태가 눈앞에 들어왔다.

이완철 장로는 한 사람을 믿게 하려고 피와 땀을 쏟으며 온 힘을 기울여 개척교회를 했었는데, 천하보다 더 귀한 성도들을 다른 교회들로 흩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30명의 신자가 모여 100만원의 임대료를 주고 1975년 6월 1일 주일 아침 당진중앙성결교회 간판을 걸고 예배인도를 하며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완철 장로는 첫 예배가 시작되기 전날 1975년 5월 31일 예배당 옆 부설로 되어있는 방으로 침구를 옮겨 계속 기도 하면서 혼자 지냈다.

1975년 9월 17일 담임목사로 김창현 목사를 청빙하고 1978년 5월 5일 김창현 목사 위임식과 강승엽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다.

김창연 목사와 이완철 장로는 교회 일에 온 힘을 다하니 날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 개척 1년 만에 140여 평 교회를 건축했다.

새벽예배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1975년 10월 16일, 이완철 장로가 그날따라 보이지 않아 김창현 목사는 이상히 여겨 언제나 기도하고 숙직하고 계시던 교회 옆방으로 가보니 부엌에서부터 가스 냄새 진동하여 방문을 열어보니 장로님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고 거의 죽은 사람이 되어 외과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하니 눈의 동공은 반응이 없고 산소호흡마저 거부된 상태였다.

그러나 산소 공급이 시작되고 열일곱 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어도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다시 살게 된 이완철 장로는 정성을 다해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생명의 은인인 담임목사님을 잘 섬겼다.

김창현 목사는 이완철 장로를 아버지처럼 모시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당진중앙성결회는 재건축을 하여 날로 부흥발전 하여 대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완철 장로의 아내 편정희 권사는 9남매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온갖 일을 다 해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랜 투병 끝에 이 장로보다 2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장로는 예수를 영접한 뒤 평신도 목회자로 평생 일하다가 의의 면류관 받으러 2001년 12월 8일, 86세로 소천하였다.

장남 이삼범 장로를 비롯 9남매가 배우자들까지 18명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완철도서선교회를 조직, 약한 교회나 섬교역자를 후원하면서 계속해서 주의 일을 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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