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해 예수님 영접하고 야간중학교 설립

그는 삼환농장에서 일하던 11년 만에 포도밭 농장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향의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 포도밭을 매각하고 고향 서산으로 돌아와 인지면에 있는 과수원 7,000평을 매입했다. 부모님을 자주 뵙고 또 과수원 주인으로 마음이 뿌듯했다.

또 지방 유지가 되어 의용소방소 대장으로 임명받아 지역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1950년 6.25 전쟁이 터져 그는 유지들과 같이 피난을 떠났다.

아내는 남편 대신 농장을 지켰는데 과수원에서 나온 복숭아와 포도 등 모든 것을 인민군들이 싹 쓸어갔다.

그뿐 아니라 공산당이 수시로 찾아와 남편이 어디 있느냐고 협박하며 못 살게 굴었다.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북한군이 북으로 쫓겨 피난 갔던 유지들이 돌아왔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과수원은 시시때때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데 전쟁 중이라 과수원을 가꿀 수 없으니 폐허로 변할 수밖에 없어 할 수 없이 과수원을 팔았다.

그 후 당진으로 이사를 해 다른 사람 농장에 들어가 일을 보던 1951년 어느 초가을 저녁이었다.

같은 면에 사는 이진환이 찾아와 하루 밤 같이 자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신약성경 한 권을 주면서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갔다.

대대로 내려온 유교 가문이어서 예수님에 대한 일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마침 성결교회 총회에서 파송한 십자군전도대가 당진으로 내려와서 전도 집회를 했다.

평소에 그와 친절하게 지내던 조원택 집사 내외가 간곡히 부탁하여 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설교를 듣고 마음이 감동되어 손을 들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자가 되었다.

당시 십자군 전도대장 최창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는 큰 은혜를 받고 큰 깨달음이 왔으며, 이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이제 나의 삶과 정신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기의 이름을 이경우에서 이완철(李完哲)로 개명하고, 새 이름으로 교회에 등록을 했다.

그는 농사를 잘 지어야 잘 살수 있다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지난 세월에서 이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당진성결교회에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집사로 임명을 받은 후 청년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주위에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이 겨우 초등학교를 나와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있음을 보고 마음 아팠다.

저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학교를 설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하던 중 담임목사를 찾아가 상의하자, 허락을 받아 1955년부터 당진성결교회 안에 있는 건물에서 시작하여 1960년 말까지 야학교를 운영했다.

그의 장남 이상범은 고등학생으로 야간에는 수학과 영어를, 장녀와 그는 중학교 전 과목을 가르쳤다.

졸업생 중에는 후일 성결교단 총회장을 지냈던 목사도 있고 장로, 권사, 집사, 한의사도 배출되고, 나중에 지역 유지들도 배출되었다.

이완철 집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의 일을 위해 전심을 다해 일하면서 마음에 큰 기쁨이 왔다.

1962년 11월 20일에는 대전 중앙성결교회 김재환 장로가 서신을 보냈다. “난지도에 구호양곡을 보내겠으니 나눠주면서 이완철 집사가 관리하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개척하라”는 것이다.

김장로는 충남 사회사업회장으로 선교사들의 구호사업에 책임진 분의 편지였다. 이완철 집사는 그렇다면 “전도사님 한 분을 파송해 주세요.”했더니, 김 장로는 “그럴 형편이 못 되고 파송할 전도사도 없으니 이완철 집사가 해 보시오”하는 대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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