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조관 압도한 답변 김기삼 목사는 사흘째 또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오늘은 또 무슨 고문이 있을는지….

“주여, 오늘 나에게 임하는 시험을 이기게 하소서.” 이시이가 갑자기 “이 신분증이 기억이 나는가?” 하며 눈을 부라린다.

18년 전 여름철에 3개월간 동아일보사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수재민에게 구호금을 나눠줄 때 사용하던 무임승차권이었다. 이런 신분증이 있음에도 그 경력을 뺏다는 것과 동아일보는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신문이고 기자는 다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라고 하며 위협적으로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또 네 교회에서 세 사람의 학도지원병이 도피한 것도 네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말한다. 김기삼 목사는 대담하게 말했다.

“학도지원병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지 실상은 강제징병인 까닭에 그들이 도피한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 나의 조종으로 한 것 아니요. 나는 조선 독립운동이 폭력적 정치혁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 이상을 신앙으로 대치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한 순정을 기독교의 천국 운동에 정열을 기울여 바쳐왔던 것이요.”

김 목사의 답변은 취조관들을 압도하는 듯했다. 다께우찌 주임이 조선에서 20년 형사를 지낸 오사카시 경찰국 내선과(內鮮科) 형사 구도(工藤)를 데려왔다. 네 사람이 두 사람씩 교대하여 72시간 동안 밤낮 계속 심문한다.

심문 내용은 이러했다. ①동아일보사 재직 중에 어떤 반정부음모가 있었는가, 거기 관련된 인물은 누구누구였던가? ②학교 재직 중에 학생들에게 어떤 사상을 고취했으며 어떤 운동을 했는가? ③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왜 목사가 되었나? ④신사참배 거부는 일본 정신의 반역 행동이 아닌가? ⑤교회 강당에서 무엇을 말했는가? ⑥기독교 재림운동은 세계를 제패하려는 유대인의 시온운동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닌가?

김기삼 목사는 밤에 한잠도 자지 못하고 한 줌 밥을 먹어가며 계속 심문을 받으니 신경이 피로하여 정신적 판단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취조관들의 계획적인 올가미에 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후일 예심 검사가 김기삼 목사가 서명한 자백을 읽을 때 그 내용을 부인했다. 또 신앙 사상을 기록하라고 한다. ①기독교의 우주관 ②기독교의 신관 ③기독론 ④교회론 ⑤성경론 ⑥종말론. 매일 한 문제씩 성경을 참고하면서 기록했다.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에 취조관도 초조한 모양이다. 다께우찌는 조사를 빨리 끝내라고 독촉이 성화인 것 같다. 이시이는 300면이나 되어 보이는 조서를 내 앞에 놓으며 서명 날인을 요구한다. “당신들이 마음대로 고쳐 내 의사를 무시해 만들어놓고 서명을 하라는 것은, 인격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요.” 그러나 공습은 심한데 밤낮으로 읽어도 2~3일이 걸릴 것이다.

“이 조서가 많아진 것은 김 목사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전시에 국방복을 한 번도 입은 일이 없고, 신사참배는 자살행위라 하여 불참했다. 등하불명(燈下不明) 격인 일본에 건너와서 전쟁에 비협력태도를 취한 것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일본제국 국체에 반대되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김 목사가 쓴 글에 부연을 달아서 조서가 그렇게 많아진 것이니, 조서를 읽어볼 것 없이 날인 해 주시오.”

이시이가 존칭어로 부드럽게 말을 한다. 그에게 진정성도 보여서 아무 말 없이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며 지장을 꾹 눌렀다.

7월 어느 무더운 날 저녁때, 조서와 함께 오사카 검사국으로 넘어가 구치감으로 이송되었다. 133호로 2층 감방에 들었다. 2층 감방 담당 간수는 지옥의 사자 같았다.

이 지옥 사자는 혀가 짧고 말이 빨라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으면 거역한다고 하며 문을 열고 내 뺨을 치거나 밥을 넣어주는 구멍으로 손을 내밀라 하여 채찍으로 후려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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