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위해 공산당과 싸운 김홍순 목사

김홍순 목사(1906.5.16~1980.10.8)는 북한 공산당의 모진 고문과 희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굽힘이 없이, 목숨 걸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선전 분투한 복음 사역의 승리자다.

그는 공산당에 의해 악질 반동분자가 되었고, 강서보안서, 평양교화소, 진남포교화소, 함북 본궁교화소, 함흥교화소, 아오지탄광 정치범수용소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2년 동안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는 출옥 후에도 북한에서 철통 감시, 불안 조성, 위협 등 공포의 생지옥 가운데도 믿음을 굳게 지키다가 1950년 4월 13일 탈북하여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왔다.

황해도 봉산군 은파리에서 출생한 김홍순의 인생은 민족 수난 역경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강점기와 중국공산 정권의 교회 박해, 북한 공산 권력의 교회 폭압과 맞서 신앙의 선한 싸움에 선전했으며 한국교회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둘리기도 하였다.

그의 인생은 한국교회사의 축소판을 연상케 한다. 김홍순은 24세까지 복음을 접하고 경성성서학원에 입학, 졸업한 후 해주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성전건축이 절실한 상황이어서 성도와 청년들과 한마음으로 새벽기도회와 매일 정오마다 만사 제치고 믿음과 기도로 매달렸다.

성전건축을 이룩하고 감사와 기쁨을 ‘활천’에 기고했다. 1936년 목사안수를 받은 김홍순은 이후 만주 안동(단둥)에서 시무했고 평남 양시교회를 거쳐 1941년 만주 봉천(선양)중앙교회로 파송되어 교회가 부흥하던 중 8‧15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이후 만주가 공산군의 치하가 되자 귀국하여 평양의 대동교회로 부임했다. 대동교회 시무 중에 공산당의 박해가 극심했다.

평안남도 강서의 신정면 감리교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체포되어 4개의 교화소 이송을 거처 아오지 탄광수용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그는 옥중에서 새벽 4시에 간수의 눈을 피해 새벽기도하고 아침엔 죄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낮엔 죄수를 모아놓고 전도 강연을 했다.

성경을 압수당할 것을 예상하고 산상수훈, 빌립보서, 요한계시록, 야고보서, 데살로니가전서 전체를 외워 주야로 암송하여 묵상하고 전파했다.

1949년 평양을 탈출한 그는 6‧25동란이 일어나자 육군 제1회 군목 종군해 병사들의 복음화를 위해 2년간 헌신했다.

이후에는 대전중앙교회와 부산 동광교회에서 시무하며, 삶의 표어대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시련에 직면했다. 교단이 분열되자 교단 일치를 주장하다가 후에는 교단창립 정신 변질로 비난받은 보수동지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보수동지회는 사상적 혼란으로 인해 분열된 원인인 N.C.C와 N.A.E.를 모두 탈퇴해야만 합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65년 기성과 예성이 미완의 합동총회 후, 김홍순 목사는 1966년 21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은퇴 후에는 친형 김영순 장로가 설립한 서울 균명 중‧고교와 예일여중‧고 교목으로 봉사했다. 그는 ‘활천’에 ‘묵시록 7교회연구’ 3년 연재 등 46편의 글을 게재했고, 1960년 ‘활천’이 재정 악화로 5개월이나 정간되자 복간을 위해 이명직 오영필 김응조 김정호 목사 5인과 함께 집필 동인으로 피선되었다.

주요저서로 『산상수훈 강해』, 『요한복음 강해』, 『기독교의 진수』, 『모순에서 본 진리설교집)』. 『중고등학교 성경교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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