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유치장 구류

   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1942년 2월 28일 새벽 먼동이 막 틀 무렵이다. “문 열어라” 소리와 함께 형사 5명이 김 목사가 목회하는 대판 성결교회를 습격해 왔다.

두 형사는 2층 목사관으로 올라와서 김 목사를 붙들어 앉혔다. 한 형사는 김 목사의 책장과 책상, 벽장문을 열어 닥치는 대로 뒤졌다.

세 형사는 예배당에 들어가 흙발로 강단 기도실을 수색했다. 그들은 설교 노트와 서류를 한 뭉치로 묶었다. “너는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더냐?” 묻는다. “내가 생각하기보다 늦기는 하나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다.”

이미 1941년 6월에 김 목사가 속해 있는 일본 홀리네스(Holiness) 교회가 일본 국체에 반역되는 교리를 선포한 죄목으로 60여 명의 교역자가 검거되었고 홀리네스 300여 교회와 2만5,000여 명 신도를 해산시킨 사건을 미루어 김 목사의 검거는 시간문제였다.

김 목사는 2차 검거를 당한 것이다. 마기노(牧野) 형사는 말하기를 “너는 왜 일차 검거사건이 있을 때 교회의 문을 닫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이 변을 당하느냐?” 이것은 김 목사 가족을 동정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김 목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 하는 말이다. 김 목사는 이미 이 때가 올 것이라 예상하고 마음을 단단히 준비했다. 비록 교회가 폐쇄되고 투옥될지언정 2백여 명 신도를 버려두고 비겁하게 도망칠 마음이 없었다.

형사들은 일어서기를 재촉한다.

김 목사는 병으로 누워있는 딸 순희(실명 혜희)에게 “아무 염려 말고 병 치료를 잘하라. 예수님이 네 병을 고쳐주신다. 내가 곧 돌아오마.” 한마디 위로의 말을 남겨 주고, 아내가 재빨리 지어 주는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책 두 뭉치와 담요를 들고 연행되어 아베노(阿倍野) 경찰서로 갔다. 2시간의 긴 유치 수속 절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먼발치로 검사구인장을 보니 ‘국가보안 유지법 위반’ 죄목이 적혀 있었다. 유치 수속 절차가 끝나자 김 목사는 아래층 유치장으로 끌려가 덜커덕 철문 닫는 소리와 함께 유치장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각종 잡범이 모인 이곳에도 질서가 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고참이 문 앞에 앉게 되고 신입자는 변기통 옆에 앉게 된다. 그리고 신입자가 먹지 않은 밥은 제일 고참이 먹는 것이 규례라고 한다.

밤이 되면 취조실에서 들려오는 “아야… 아이고…” 신음, 고통을 하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김 목사는 감옥살이 초년병이 아니다. 3‧1운동 때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1년 6개월을 옥살이한 경험자다. 그래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피를 토하고 목숨이 끊어져도 의를 위해, 예수의 진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짖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가는데, 주여! 우리 가족과 목자 없는 양 같은 가엾은 신도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순희의 병이 낫도록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긴박해져가는 세태는 주님 오시기를 재촉하나이다. 마라나타. 아멘.”

김 목사의 간절한 기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서 나갈 소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왕 죽을 바에야 하루속히 죽었으면 고통도 덜할 것이고 주님께 영광이 될 것도 같지만 한편 가련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살아갈 수 있으면 하는 소망을 갖기도 했다.

유치장에 온 지 한 달이 넘으니 감방 안의 얼굴이 모두 바뀌고 김 목사가 감방장격이 되었다.

북지사변(北地事變)에서 중국인 포로 48명을 단칼에 죽였다는 기다야마(北山)란 자가 들어왔고 살인강도 아즈마(東)가 김 목사 곁에 누웠다.

그들의 몸이 살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가나야마(金山)란 소년을 동포라고 담요에 같이 누었더니 옴이 올라 큰 고통을 당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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