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성결교회 개척과 장로 장립 주일이면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 초신자 집에서나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렸으나, 사람들이 많아지자, 장소가 좁아 소난지도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예배드리는  일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소난지도에서 대난지도감리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3명 있었는데, 그들이 방해하기 위해 공공건물에서 예배드릴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어느 날 감리교회 목사와 청년 30명이 왔다. “교회도 의리와 질서가 있는 법인데 남이 닦아놓은 터 위에 선교하는 것이요?” 바울사도의 말을 빌려 시비를 걸었다. 31대 1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함을 믿고 맞섰다.

“나는 성결교회에서 온 전도인이요. 당신들이 닦은 터는 무슨 터인지 모르나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성도들을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터에 성전을 짓고 복음을 전파할 뿐이요. 감리교회에서 구원 못 시키는 가정, 성결교회에서 전도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니, 기가 죽었다.

그는 “어떤 방도로 하든지 예수만 전파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요. 감리교회 성도가 되든 성결교회 성도가 되든 다 구원받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은 바랄 것입니다. 나는 오늘부터 벽돌을 찍어 낼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들도 “우리도 오늘부터 벽돌을 찍을 것입니다.” 했다.

이완철 집사 일행은 동네 뒷산 약간 높은 지대에 성전 터를 잡고 시멘트 블록으로 벽돌을 찍었다.

그들은 동네 중앙에 터를 잡고 흙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비가 와 흙벽돌은 다 뭉개지고 시멘트 블록은 물 줄 필요도 없이 더 단단해졌다. 그러기를 서너 번 하다 그들은 별수 없이 손을 떼고 떠났다. 하나님께서 판정승하게 하신 것이다.

성도들의 정성 어린 헌금과 세계구호위원회 후원으로 성전의 건물만 완성하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1963년 5월 5일 섬 전체가 복음화되어 입당 예배를 드렸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대난지도 감리교회로 다녔던 두 가정, 3명의 성도도 결국에는 소난지도성결교회로 돌아와 착실한 신자가 되었다.

한 달에 한 차례씩 구호양곡이 도착했는데 배급이 중단된 사태가 꼭 한 번 있었다. 알아봤더니 구호위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조0천이란 자가 구호양곡을 한차 싣고 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그 외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차재덕 성도의 집에서 숙식을 담당해 주어 그 어려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해창으로 개척하러 가야했다. 김재환 장로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소난지도로 가려고 4시간을 걸어, 해창에 도착했을 때 하루 한 번 왕래하던 배는 이미 끊겨서 이장댁을 물으려고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을 보고 수상하게 여겨 “간첩이 출몰했으니 다 나와보시오.”하여, 동네 건장한 남정네들이 이장 집으로 모여든 적이 있었다.

그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부터 담화를 시작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이웃에 화목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내가 무엇을 하러 소난지도에 간다는 것까지 알려주자, 그들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해창은 용왕제나 풍어제를 지내며 미신을 받들면서 고기잡이를 해가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1963년 7월 6일 해창에 도착하여 개척의 뜻을 전했더니 이튿날 저녁 이장 집 마루와 대청, 마당에 주민 남녀노소 100여 명이 모였다.

그들과 함께 먼저 해창성결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구호양곡차가 도착했다. 모인 주민에게 구호양곡을 나눠주었다.

1963년 12월 대형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는데 1964년 2월 216평을 성전부지로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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