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하 목사

서울신대 사감으로 신학생들 변화시키다  1961년은 성결교회 분열의 해였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50년 6.25전쟁을 치룬 한국교회는 반공사상에 철저했는데, 당시 미국은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이어서 자유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장로교, 감리교 목사들이 귀국한 후 한국교회는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로교회 총회에서 기독교장로회가 1954년 분열되어 나갔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자유파들이 기독교연합회(NCC)를 장악하게 되자, NCC탈퇴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다시 장로교회가 크게 다투다가 보수파는 합동 교단, 진보파는 통합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성결교회는 1961년 NCC 탈퇴를 보수파에서 주장했으나 총회 투표에서 보류키로 하자, 보수파들이 퇴장하고 나가 예성을 조직하므로 교단이 분열됐으나 기성은 사중복음 중심의 신학이 있어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예성파들은 NCC파는 자유주의 신학이고 용공주의라고 반박하고 교인들을 선동하므로 교회마다 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성총회는 그해 11월 임시총회에서 NCC를 탈퇴키로 결의를 했는데도, 예성교회는 계속 기성교회를 자유주의 용공파로 매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태구 목사는 기성인 서아현교회로 부임했는데, 여기에도 예성의 거짓 선동에 취한 제직들이 있었다. 언제나 중생과 성결만을 설교하는 김 목사에게 교리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자 교회가 예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트집 잡아 설교를 자주 방해했다.  

어느 때는 설교 중에 청년 몇명이 올라가 김목사의 넥타이를 잡고 끌고 내려오는 짓을 했으나 김목사는 유도로 단련된 큰 체구이기에 한 번 떠밀면 그들을 이길 수 있지만 어린양처럼 순순히 끌려내려 오자, 이를 본 여신자들이 크게 울면서 교회를 떠났다.

김 목사는 이런 일을 몇 번 당해 그의 와이셔츠 몇 벌이 찢어졌으나 조금도 대항하지 않은 예수님 닮은 성자였다. 그는 신공덕교회를 거쳐 1964년에 서울신학대학의 사감으로 발탁된다.

신학생들의 80%가 기숙사생인데, 매일 새벽기도회의 설교를 통해 영성을 강화하는 사명이 사감의 역할이기도 했기에 학교는 이론교육과 더불어 이 귀한 사명을 위해 성결주창자였던 그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새벽마다 중생과 성결의 복음을 체험과 간증을 통해 강력하게 외치자, 처음 냉담하던 신학생들이 차츰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며 회개를 통한 중생의 경험과 성결의 체험으로 신학생들 상당수가 구원의 확신과 함께 삶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역사적 사례가 서울신학교에서 몇 번 있었다.

가장 크게 기억되는 것은 1921년 이명직 목사의 성결부흥회였다. 이명직 목사는 일본 신학생 때 중생을 체험했으나 고국에 와서 서울신학교 교수를 하면서, 원치 않은 죄성이 마음에 살아있음을 깨닫고 금식기도를 했다. 그는 자기 연구실 문을 안으로 잠그고 금식하면서 성결은혜를 받기 위해 회개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했다.

그는 사흘 만에 원죄의 뿌리가 제거된 확신을 받고 나와서 모임에서 간증했는데, 신학생들이 통곡과 회개로 성령충만을 받아 그들이 목회하는 곳마다 큰 부흥이 일어났었다.

그런 역사가 김태구 목사를 통해 서울신학대학 안에서 재현된 것이다. 그가 1964년부터 6년 간 사감 시절 그의 설교를 듣고 중생과 성결을 체험한 신학생들이 졸업 후에 목사가 되어, 그 은혜를 계속 간직하기 위해 ‘Wesleyan Crusade’를 조직하여 교단에 한때 성결의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중 대표가 류종길, 김광렬 목사였다. 그들이 섬기는 교회들마다 성결한 교회로 성장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로만 바르게 성장한다는 교훈을 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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