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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무 목사(본지 전 주필) 

최후의 절규 형사들은 내 머리와 수염이 긴 것을 보고 너무 험상이 궂어 앞에 놓고 심문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이발하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 단골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주며 우대한다.

‘이놈들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든다. 6월 1일에 다시 특고실로 불려갔다.

내 삭발한 모습을 보고 “목사가 중이 되었군” 하면서 자서전을 쓰라고 양면 괘지와 연필을 준다.

자서전을 쓰는데 무엇인가 속에 뭉클하는 것이 있었다. 나에게는 3.1운동 당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1년 반이나 부산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가석방된 사실이 있다. 이 사실을 빼놓고 쓴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하다.

부질없이 사상적 의심을 받을까, 염려되어 고의로 빼 버렸다. 3~4일이 지나도 불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형사들이 여러 번 가택수색을 하고, 아내에게 내 자서전 기록을 대조하기도 하고, 없는 사실을 넘겨짚기도 하고, 또 아내를 위협하며 아내까지 구속하여 아이들을 고아로 만든다고 협박하였다.

아내는 그런 잔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다시 나를 불러내어 “자서전에 빠진 것이 없는가?”라고 묻는다. 처음에는 별로 빠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무슨 근거가 있는 듯, 무슨 증거라도 파악한 듯 묻는데 나의 마음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자서전 기록을 도로 달라고 하여서 3.1운동 관련 사실을 기록했다.

이튿날 다시 취조실로 불려갔다. 다께우찌가 중앙에 앉아있고, 좌우에 이시이와 시미시가 살기 등등한 기색으로 앉아있다. “잘 생각해 보았는가?” 하고 묻기에 “그 이상 기억나는 것이 없다.” “김기삼은 목사라고 신사적으로 대답할 줄 알았더니 사내답지 못하구나.” 다께우찌가  “이놈아 바른대로 말해라” 하며 검도로 내 어깨를 탁탁 탁탁 쳤다.

3.1운동에 대한 부산물을 얻고자 하는 눈치다. “이놈아, 네가 기독교라는 종교의 탈을 쓰고 강단에서 민족주의를 고취한 놈이 아니냐? 바른대로 말해라” 하며, 이시이도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검도로 마구 난타했다.

시미시는 검도로 내 등을 콱 밀어 거꾸러뜨리고 등과 허리를 마구 친다. 두 형사가 마주 서서 전신을 난타한다. 내가 죽어가는지 살아날 것인지를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물을 한 컵을 마시게 하여 의식을 회복시킨 후에 “이래도 네가 바른말을 못 하겠느냐? 3.1운동 이외에 또 한 가지 빼놓았다!” 다그친다.

“당신들이 알면 말해 달라. 나는 도마 위에 올려놓은 고기 신세다. 너희들 마음대로, 입맛대로 요리하라.” 이렇게 말하고는 사지를 쭉 뻗고 누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감방에 들어갔다. 이튿날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출입문에 ‘취조 중 출입엄금’이라 써 붙였다.

실내에는 굵은 가죽끈이 놓여 있고 밤알처럼 굵고 튼튼한 주판 두 개가 있고 두꺼운 나무토막 바둑판이 놓여 있다.

시미지 형사가 눈알을 굴리면서 서 있고 이시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잘 생각해 보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소.” “이 자식 오늘 내 손에 죽어 보라” 하며 시미시가 가죽 채찍을 들고 두 개의 주판 위에 꿇어앉으라 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빨리 죽여달라” 하며 주판 위에 꿇어앉았다.

참새 다리와 같이 야윈 다리뼈가 으스러지도록 아팠다. 5분이 채 못 되어 바둑판을 밀어 던지고 앞으로 거꾸러졌다.

“이놈들아, 나를 절도나 강도로 취급하느냐?” “이놈아 잔소리 말라 죽어도 바른대로 못하느냐?” 하며 시미시가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붉은 독사가 칭칭 감은 듯 온몸이 부풀어 올라 붉고 푸른 자욱이 생겼다.

“이 무지한 놈들아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때리느냐? ‘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백성을 부끄럽게 한다’고 했는데 너희가 이렇게 불의한 행동을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아니할 줄 아느냐?”

이것은 나의 최후의 절규이며 반발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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