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난지도에 구호양곡 나눠주며 교회개척

이완철은 이제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어 날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며 기도했다.

며칠 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세밀한 음성을 들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기도와 성경 연구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다. 1962년 12월의 어느 날,  그날따라 함박눈이 퍼부어 해창까지 가려면 걸어서 4시간이 걸리기에 난감했다.

아내는 “눈이나 그치거든 떠나세요”라고 권면했으나 “아니야, 오늘이 지나면 내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 지금 가야 한다”고 이완철 집사는 담대하게 말했다.

한때는 온 가족이 잘살아보자고 과수원 일부터 온갖 일에 젊음을 바쳤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보니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했다.

특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하는 말씀은 가족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주었기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어떤 곳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은 아내가 해준 따뜻한 밥으로 자녀들과 오손도손 살았지만,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섬사람들에게 구호양곡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같은 사명에 따라 주거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성경과 찬송가만 가방에 달랑 넣고 떠나야 했다.

막내딸이 태어난 지 4개월, 엄마 품에 안겨있고 바로 위 세 살배기 아들은 엄마 치마꼬리 잡고 서 있는 어린 아들, 학교 다니던 자녀들과 커가는 모든 자녀 4남 5녀를 아내와 함께 두고 언제 돌아올 기약도 없는 집을 떠나는 발걸음이었다.

한참 커가는 자녀들은 아버지를 향해 무책임하다고 불평하겠지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던 것처럼 구원받아야 할 섬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보내시니 내 어찌 편한 밥 먹고 가정을 위해 멈출 수 있단 말인가?

함박눈을 맞으며 4시간을 걷고 또 걸어, 해창에 도착하니 하루에 단 한 번 왕래하던 배는 이미 끊겨 갈 수 없어 이장댁을 물어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1시간 30분간 배를 타고 소난지도에 도착했다.

소난지도는 전에는 100여 호가 살았는데, 논이 없어 쌀 한 톨 생산할 수 없는 몹시 가난한 섬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육지로 떠나고 겨우 주민 30호 정도였다.

남은 주민들은 바위에서 자연산 김을 뜯고 굴을 까서 겨우 살아가고 있었다. 섬은 충청남도에 속했지만 자녀교육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격일로 왕래하는 배를 타고 인천으로 유학 보내는 실정이었다.

또 파도가 심한 날엔 며칠이고 기다려야 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였는데, 먼저 소난지도 이장 최상화 씨를 방문하여 기독교의 복음 전할 뜻을 말하고, 세계구호위원회에서 구호양곡을 보내주어 섬 주민들에게 나눠 줄 것이라고 하니 아주 반가워했다.

그해 12월 21일 구호물자를 받으려고 섬 주민이 몰려들자, 그는 먼저 예배부터 드린 후 강냉이가루, 밀가루. 보리쌀, 분유, 식용유 등을 나눠주고 대난지도까지 전달했다.

원래 논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라 쌀은 생길포를 거처 하곡, 명지, 대산 등에서 구입해 왔다.

그해 따라 너무 추워서 바다가 얼어붙어 배가 다닐 수 없었기에 이완철 집사가 나눠 준 구호품으로 소난지도와 대난지도는 어려운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집사가 섬으로 온 것은 기아에 허덕이던 섬사람들을 살리려고 온 천사와 같은 사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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