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성결교회 목사가 되다

         류재하 목사

김태구는 1948년 서울 영천 나사렛교회의 전도사로 청빙되어 일하다가 성결교회 신학교가 아현동 언덕에 있음을 알고 1949년 서울신학교에 응시, 이건 교장이 면접고사에서 그의 중생 성결을 체험한 고백을 듣고 그를 껴안고 환영한다고 하자 역시 성결교회는 다르다고 감동 받았다.

그가 2학년 때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 학교가 휴교하자 학생들은 고향이나 섬기는 교회로 갔다.

그도 고향에 갔지만 7월 중순에 인민군이 들어와 토박이 빨갱이들이 설쳐대므로 숨어 지냈는데 어느 날 초등학생 제자가 멀리 도망가라고 해서 다른 군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국군들과 함께 10월 하순에 돌아왔는데, 아뿔싸! 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한 아버지를 빨갱이들이 체포하여 인민재판에 세워, 예수 믿는다는 것과 지주라는 2가지 이유로 유격대장 한00 청년에 의해 처형당해 순교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한 죄의식에 열흘 동안 금식과 통곡으로 보내자, 사람들이 그를 효자라고 했다. 북으로 도망가려다 잡힌 살인자 한OO이 체포되었는데, 가족의 입회하에 처형하겠다고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그래서 가족이 같이 갔는데 죽이고 싶도록 미운 원수를 보는 순간, 김 전도사는 묵상하며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 그가 너무 불쌍해서 경찰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예수 믿고 70세에 순교, 천국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씨는 30세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 죽으면 지옥 갑니다. 살려서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서 그를 살려주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놀라며, 그를 참 목자라고 인정하고 교회에 나와 신자가 되었다. 이 사실은 그의 고향 상월교회의 순교비에 잘 새겨져 있어 보는 자마다 은혜를 받는다.

그는 신학교에 계속 수학하면서 6개월 방학 하는 동안에는 부흥사 이성봉 목사를 보필하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중생 성결의 복음을 전했다.

때로는 이성봉 목사님이 과로로 피곤할 때는 그를 강단에 세워 중생 성결 복음을 간증하게 했다. 이성봉 목사가 가장 아끼는 성결 제자였다.

김태구는 1953년에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중앙교회에 시무하면서 새로 교회당을 건축했고, 중생과 성결의 확신이 없는 집사나 장로들이 구원의 확신을 받아 충성스런 제직들이 되었으며,  마침내 1956년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그렇게 소원하던 성결교회 목사가 되었다.

1957년에 그는 경기 광주 구천교회 목사로 청빙 받아 헌 교회당을 헐고 빨간 벽돌 2층 교회로 신축하여 200여 명이 예배드렸다.

구천면은 당시 서울시 인접이어서 제법 번화하고 교회들도 많았는데, 김 목사의 설교와 사랑으로 구천성결교회가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1960년 9월 필자가 신학교 졸업 1학기 남기고 휴학한 후 구천교회 성가대와 중고등부 교육전도사로 잠시 봉사했다.

그때 김태구 목사는 틈을 내어 서울형무소에 있는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사형수)를 천국에 보내려고 계속 복음 전하러 갈 정도로 불쌍한 영혼을 사랑했다.

1961년 4월 어느 봄날, 전교인야유회를 갔는데 김 목사가 안 보였다. 수석 장로가 말하기를 “어젯밤 시장이 큰불로 전소가 되었는데, 이OO 집사의 점포도 전소되어 목사님이 가서 위로했지만, 너무 마음이 상해 오늘 못 오셨다”며 류 전도사가 설교해달라고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부탁에 설교하긴 했지만 무슨 설교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처럼 김 목사는 신자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었다.

필자는 1961년 5·16 쿠테타 소식을 이곳에서 듣고 7월 초에 입대하느라 떠났고, 김태구 목사는 그해 말에 서울 서아현교회 청빙 받아 갔다. 그 후 구천면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천호동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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