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하여 평신도 전도인으로의 삶

      류재하 목사
류재하 목사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 기습폭격으로 유발된 태평양전쟁으로 일본 사회는 전시상태가 되어 불안했다. 성령충만을 받은 김태구는 속히 돌아가 동포에게 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이듬해 봄에 선박을 타고 목포항에 귀국, 곧 고향으로 갔다.

고향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시상황으로 조선총독부는 군수물자를 위해 전국 농민들을 전보다 더욱 심한 공출로 닦달해 모두 울상이었다. 그런 중에 환히 웃는 얼굴로 귀국한 태구를 보며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와 반갑게 맞았으나 그의 영적 변화와 인자한 미소에 놀랄 뿐이었다.

그는 속에서 불타오르는 영혼 구원의 열기에 며칠 쉬지 못하고 정보를 얻어 목회자가 없는 교회들을 찾아가서 마을을 먼저 전도하고 종을 쳐 신자들과 교회에 모여 예배드렸다. 목회자가 없어 예배가 중단된 사람들이 오랜만에 성령충만한 설교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목사나 전도사도 아닌 전도인으로 모교회 상월교회를 비롯 월창, 매월 등 3교회를 번갈아 가며 주일 11시, 오후 2시, 저녁 7시에 예배를 인도하여 은혜를 받게 했다. 그들은 회개와 중생, 성결이란 말을 처음 들었으나 성령의 역사로 회개와 중생을 체험했고, 처음 나온 자들도 금방 눈물로 회개하고 병든 자들도 안수하자 일어나는 큰 역사가 나타나 크게 소문이 났다.

 은혜 받은 새신자들을 세례 받게 하려고 이웃 강진장로교회 목사를 초청, 세례식을 거행했는데 세례 받은 성도에게 권면하는 김태구 전도인의 불타는 말씀에 목사가 은혜를 받고, 그를 강진교회 부흥강사로 초청했다. 목사 아닌 전도인이 큰 교회 부흥강사가 된 것이다.

 강진교회 부흥회는 그야말로 은혜와 성령충만이었다. 첫날부터 회개하는 통곡 소리들이 터져나왔고, 오래 믿은 집사들도 회개하느라 눈물을 흘렸다. 김OO 집사 부부는 큰 은혜를 받고, 김 전도인과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딸 혜경 선생과 맺기를 원해 결혼을 한 경사도 생겼다.

 강진교회 목사의 설득으로 장로교전남노회는 신학도 하지 않은 김전도인을 1945년 5월 1일 ‘전도사’로 임명하는 특별조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장로교보다 성결교회에서 전도목회를 하고 싶어 그의 매부 한의사 최성기 장로와 함께 성결교회 없는 장흥군에 장흥제일, 안양교회, 내안리, 해창성결교회를 개척하고 그가 순회예배를 인도하여 든든한 교회로 세워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주둔한 미군정 영암에서 영어 잘 하는 김태구에게 통역을 부탁하여 일주일에 하루만 가서 몇 달 봉사도 했고, 또 교사가 부족한 시골학교에서 교사로 요청하자, 아이들을 바르게 교육시키는 것이 좋아 1년만 했는데, 점심을 굶는 아이들 16명을 위해 자기 집에서 도시락 16명분을 매일 가져와 먹이는 사랑의 선생님으로 유명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첫 농림부장관 조봉암이 토지개혁을 단행하겠다는  신문을 본 그는 그의 전도로 예수를 믿기 시작한 아버지께 성경을 읽어드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 19: 21). 그 외 여러 성구를 찾아 읽었다.

 그는 토지를 빼앗기기 전에 먼저 소작인에게 나눠주자고 말씀드렸다. 처음엔 반대하시던 아버지가 그의 간청이 계속되자, 선뜻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는 토지개혁이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를 도와 소작인 98명에게 토지를 고루 분배했는데, 그들이 감동을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 후 국가에서 북한과 달리 토지개혁을 유상으로 실시했으니 그가 토지를 나눠주지 않았다면 장남이기에 큰 부자로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이처럼 나눔을 실천한 참 예수의 제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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