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농업활동

이완철은 1915년 3월 15일 부친 이종근 씨와 모친 김정자 사이에 5남 4녀 중 3남으로 충남 서산군 부석면 마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이경우였다.

그의 부친은 조선 말기 관리로 강화부정족산성 사고(史庫)를 관리하는 참봉 벼슬을 하다가 한일합방으로 인해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로 보낸 후, 나라 잃은 슬픔에 통탄하고 충남 서산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냈다.

부친이 충남 서산으로 내려온 후 서산에서 태어난 이경우는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문학습을 배우고 부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다시 한문 교육반에 들어가 명심보감, 사서삼경과 대학 등을 배웠다. 당시는 재산가가 아니면 보통학교 가기도 어려운 시절이어서, 보통학교 졸업만 해도 지식층 인물로 면이나 군청 서기도 할 수 있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었다.

이경우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가르침에 감동하여, 앞으로는 농사일에만 종사할 것을 결심했다. 마침 농촌진흥강습회가 안면도에서 한 주간 개최되어 참석했는데, 강사였던 일본 농학박사 웬기찌 교수의 강연에 여기서 자신의 진로를 확실하게 결정했다.

당시 마을 이장은 40리나 먼 곳까지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했는데 큰형이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본으로 유학 가면서 동생에게 본인 대신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열아홉 되든 해 부터 낮에는 농사일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과목은 한글 한문 일본어 등을 가르치면서 우수한 학생은 부모와 상담해서 시험을 쳐 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시켰다.

21세가 되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얌전하다는 규수, 태안군 남면에 사는 세 살 아래인 18세 편정희와 결혼하면서 야학도 사표를 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배운 제자는 학교 교장까지 한 사람도 있었고 각종 분야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농업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리라 다짐하고 마을 이장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지만 아직은 영농에 관한 기술이 부족했고 힘써 일해 거둔 곡식들을 공출이란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약탈해 가니 농사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자 온양 삼환농원 직원으로 취직해 24세에 고향을 떠났다.

거기에서 열심히 일하던 중 그의 성실함과 남다른 기술로 다른 사람이 2년에 습득할 것을 6개월 만에 해냈기에 농장주인은 다른 일꾼들을 제치고 주임으로 임명했다.

당시 일본인이 농장의 주인인데 일본인과 한국인 차별 없이 입사 2년 만에 과학기술 연수를 받을 수 있게 하여 일본 북해도 삿보로 농과대학으로 가서 6개월간 수강하도록 보내주므로 그는 가서 열심히 배운 대로 부지런히 기록한 노트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삼환농장으로 돌아와 신기술을 도입하려 했지만,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므로 소위 태평양전쟁이 유발되었다.

전쟁하는 4년 동안 일본은 전쟁 군수물자가 모자라,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까지 농산물을 착취하느라 농장을 제대로 경영할 수 없어 쉬는 날이 많았다.  

마침내 1945년 8월 초순에 미국의 폭격기가 원자탄을 투하하여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두 도시가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함께 초토화되므로 일본은 항복하고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에 상주하던 일본인들이 조국으로 쫓겨 갔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한국인 이영진이란 사람이 농장주인이 되었다.

농장주인이 된 이영진은 과수원 일을 열심히 했던 분들에게 각각 밭을 나누어 주고 오랫동안 공로가 있는 이경우 주임에게는 포도밭을 분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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