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 잃은 성도의 애환

49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혹시 김기감 목사를 유치해 놓고 잊었는가 싶더니 4월 7일 간수가 비로소 김 목사를 불러내며 “너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며 빙그레 웃는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밖에 나가니 중년 신사 차림의 형사가 김 목사에게 “그동안 퍽 고달팠지요?” 하며 특고실(特高室)로 인도한다.

한쪽 테이블 위에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다. 굶주린 판에 달게 먹고 나니 밥값은 당신이 맡겨놓은 돈에서 지출하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경찰서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서 산책하도록 한다.

그들이 김 목사를 50일 가까이 가둬둔 것은 그를 위협하는 방법이요 그를 갑자기 우대하는 것은 그의 쇠약함을 회복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김 목사가 잡혀간 후에 교회는 폐쇄되어 목자 잃은 양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내 한도숙은 주일이 되면 방황하는 신도들을 데리고 교포들이 모이는 이가노야(猪飼野) 교회를 찾아갔다.

소위 국민의례가 예배순서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배 후 담임목사 김인종을 찾아보고 데리고 간 신도들을 부탁했는데 교회 간부들은 이단자를 대하듯 냉정했다.

담임목사가 하는 말이, “당신들이 예수님이 곧 재림하신다고 믿고 주장하는 그 신조를 버려야 합니다. 이 신조를 청산한다는 서약서를 우리 교회에 제출한 다음에 예배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당신들을 받아들이면 우리 교회도 폐쇄하게 될 것이니까요.”

이 말을 들은 후 그 교회에 나가지 않고 이마사도(今里)에 있는 본 교회에서 찾아오는 신도들과 새벽 제단에서 기도를 그치지 아니했다.

교회당에서 울려오는 기도 소리가 한 20명은 되는 것 같은데 누가 어느 때 왔다가 어느 때 가는지 얼굴도 볼 수 없이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갔다.

대판 교회의 열성 있는 교회 간부들이 교회 문을 재개하기 위해 그 방법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식으로 일본기독교 오사카 교구장 이노우에(井上)를 찾아갔다. 일본기독교단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에 일본 정부가 어용 기관으로 만든 단체다.

단일교단을 11부로 조직했는데 일본홀리네스교회가 분열되어 제6부와 7부로 편성되었다. 당국은 일벌백계 정책으로 일본 홀리네스교단인 제6부와 7부를 탄압하는 중이었다.

이노우에 교구장은 교회재개 조건으로 재림신앙을 고치고 간판을 갈아붙이라는 것이다. 교회 간부들은 이 조건을 승낙하고 이마사도 교회 사택에 들어있는 내 가족을 나가 달라고 교섭해 왔다. 아내는 할 수 없이 한적한 오사카 주변에 있는 히라노(平野)로 이사했다.

히라노는 김 목사가 시무하는 대판교회의 지교회로서 살림집을 개조한 것인데 그 교회를 폐쇄한 후에 협화회(協和會)라는 친일단체 사무소로 되어 있었다. 아내는 이 집을 대강 수리하여 사용하니 비교적 조용한 곳이었다.

말하자면 수감 된 목사 가족을 교회 간부들이 쫓아낸 셈이다. 그해 5월 훈풍이 불어올 무렵 이노우에의 말을 믿고 폐쇄된 교회를 다시 연 간부들은 무허가 집회라는 죄목으로 경찰서에서 20일 가까이 구류되었다.

20일 구류 경험을 한 간부들은 비로소 각성하여 옥중에서 고생하는 김 목사와 5남매를 데리고 생활난에 허덕이는 김 목사 아내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기구를 팔아 5백 원을 아내에게 전달했다.

김 목사의 아내는 배워두었던 양재기술로 생계 문제를 해결했으니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뜻밖에 간수가 큰소리로  김 목사를 불러냈다. 벽을 짚고 일어나 2층 고등계로 가는데 그의 아내가 말쑥한 옷차림과 밝은 기분으로 면회를 왔다.

검사국으로부터 위임된 취조관은 다게우찌(竹內) 경부보이고 그의 부하로 이시이(石井), 시미스(淸水) 두 형사부장이 심문할 예정이었다. 이날 김 목사는 오랜만에 아내의 면회로 위로를 받고 정성 들여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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