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 목사

김기삼 목사(1901-1965)는 부산 동래 출생으로.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예과를 수료한 지성인으로 1918년 고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3‧1만세 운동 참여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1년 6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 쓴 글이 우수하여 일인 교장 이께다의 소개서를 들고 당시 경성일보 편집국장을 만나러 상경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견습기자로 임명되자 낙심하여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찾아온 고향 친구 박문희 전도사를 만나, 성서학원에 입학하면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미국 유학도 갈 수 있다는 간곡한 권유에 경성성서학원에 가서 면접을 통해 입학했다.

당시 성서학원은 오직 성서강해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현대사조와 개혁 사상을 추구하는 그의 기대에 어긋나서, 서점에서 성경 주석서와 교리, 신학 서적 등을 사서 읽었다. 이명직 목사의 창세기 강해 시간에 진화론을 두둔했다가 교수회의에 불려가 주의를 듣고, 졸업을 앞두고 자퇴했다.

고향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1923년 한도숙 전도사와 결혼하고, 평택에서 농사와 목장을 경영하는 등 신학적 방황을 하다가 홍성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성결교회의 순복음주의신학의 소중함을 깨닫고 성서학원에 복학했다.

1937년 성서학원 졸업 후, 해주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열정적인 목회로 황해도 연합전도대 순회강사로 활동하여 174명의 구도자를 확보했다.

활천에 ‘순복음의주의 신앙의 본질’이란 논설을 게재하여, 성결교회가 순복음주의 신학임을 주장하고 가톨릭과 자유주의신학을 비판함으로써 그의 신학의 토대를 천명했다.

1939년 목사안수를 받고 ‘활천’의 집필인으로 선정되어 주필 이명직 목사를 보필하면서 성결교회의 복음주의신학의 변증에 많은 논설을 발표한 후, 1941년에 일본 오사카 이마사도(今里)에 있는 대판성결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하던 중 1943년 2월 재림론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의 체험을 토대로 ‘마라나타’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성결문인의 반열에 올랐다. 해방 후 김해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성결교단 기독교학교 인천 영화중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1950년 6‧25사변으로 귀향한 후 1957년 휴양 겸 흑산도 진리교회 개척과 흑산 중학교를 설립하고 흑산진리교회 담임과 중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1961년 교단이 분열되자, 신학적 논설과 글을 ‘활천’에 게재해 교단 개혁을 주창했고, 그는 이명직 목사를 존경하면서도 비판한 글을 죽은 후 발표하도록 남겨, 성결교회를 신학적으로 성숙시키는 일에 봉사했다.

1961년 교단이 분열되자, 분열을 조종한 I. C. C. C의 매킨타이어에게 공개서한을 통해 잘못된 신앙 사상을 명쾌한 문장으로 공박하여 신학적 좌표를 천명했다. 1965년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문필활동으로 종교소설 ‘주님 오실 때’(일명 마라나타)를 비롯해 ‘활천’에 72편의 시와 설교와 논설 등을 게재했다. 이 옥중회상기는 김기삼 목사가 쓴 소설 ‘주님 오실 때’ (부제: 마라나타)의 내용이다.

이 소설은 그가(소설에는 홍권) 일본 오사카 이마사도(今里)에 있는 대판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할 때 재림신앙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박해를 받은 내용을 소설화한 것이다.

김 목사는 소설 후기에서 원제를 마라나타로 붙였다. “나는 주께서 오신다는 새로운 기대와 꿈을 가졌다.

일본 제국주의 정치는 나에게서 이 꿈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이 꿈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나는 이 수난의 사실을 골자로 하고, 거기에 나의 민족적 감정과 사상의 살을 붙여 문학적 의상을 입힌 것이 ‘마라나타’이다.

이 소설은 종교소설이라 하겠지만, 시대적으로 보아 역사소설이요, 기록소설이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인 동시에 성결교회 수난사의 서론이요 조선기독교 박해역사의 일면이 된다면 만족하게 생각할 뿐이다.”<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