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지 탄광 사상범 수용소

김 목사는 1948년 6월 초에 함흥에서 한국의 최북단 아오지탄광 오봉(梧鳳)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사상범 일행 20여 명이 입소하는 날 각처에서 잡범들이 많이 들어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죄수 수천 명이 수용되었다. 죄수들은 주야 3교대로 쉴 사이 없이 석탄 캐는 중노동을 했다.

김 목사는 평양감방에 같이 있던 죄수들이 있는 방으로 배치되었다. 김 목사는 이야기 잘하는 목사로 소문이 나서 죄수로 조직된 자치위원회 경비반장들이 매일 와서 이야기 그에게 듣기를 즐겼다.

탄광 내의 오락 시간만 되면 김 목사를 청하여 전도 강연 듣기를 좋아한다. 김 목사를 존경하고 종이 부스러기를 비로 쓰는 일 등을 수월한 일을 시켜준다.

한 번은 새로 건축하는 초등학교 공사장에 나아가 일하고 돌아오는데 마차꾼 출신의 서무계장이란 자가 김일성노래를 부르라고 추상같이 호령한다.

반동 대학생 이원선이 개새끼라고 욕을 하며 노래 부르지 말자고 하기에 김 목사가 “이 노래 안 부르다가 매를 맞아 병신이 되는 것보다는 나가서 다시 김일성정권 타도 운동을 하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겠나?” 하지만 그는 고집하고 노래를 부르지 않다가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했고 김 목사도 구타를 당했다.

김 목사는 석탄운반 수레를 끄는 힘든 일도 젊은이에게 지지 않았다. 하루는 석탄을 가득 싣고 언덕바지를 내려오다가 수레가 전복되었다. 허리가 시큰하더니 좌골신경이 상하여 일어서 설 수가 없었다.

의무실로 갔으나 약이 없어 약을 주지 못하는 핑계로 꾀병한다고 몰아친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30리나 되는 현장에 나아가는 고통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그 좁은 틈에 끼어서 다리가 쑤시는 고통을 참기 어려웠다.

이런 중에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죄수 자치위원장이 특별히 동정하여 좀 수월한 제1항으로 옮기어 줄 뿐 아니라 문지기를 시켜준다. 병자에게 1주간만 시키는 것이 관례인데 3개월간 출옥할 때까지 시켜서 고마웠다.

건강한 몸으로 1949년 3월 23일 만기 출옥했다. 죄수들은 부모를 작별함 같이 섭섭해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들을 두고 떠나기 괴로워서 오후가 되어서 출옥했다.

본 교회 한승호 장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평양의 본 교회로 돌아오니 온 교우들과 동역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주는데 얼마 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은 되었으나 공산당의 감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가 가는 데마다 밤중에 와서 공민증을 조사하곤 했다.

교회의 학생회 간부와 부인회 간부, 유력한 집사와 여전도사의 약점을 잡아 감시원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김 목사에게 그 사실을 실토하여 알게 되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공산당 세계다.

그러나 10명이 1명의 도둑을 못 지킨다는 격으로 제아무리 물샐 틈 없이 감시해도 하나님께서 공산당의 감시에서 벗어나 자유의 땅 남한으로 탈출하도록 도우셨다.

마침내 신의주 동부교회 황주곤 집사의 안내로 그 무서운 감시망을 뚫고 1949년 4월13일에 평양을 탈출하여 해주를 거쳐 구사일생으로 자유의 땅을 밟으니 출옥 후 14개월 만이다.

북한의 수난도 이제는 지나간 꿈이요 몸과 마음이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기뻤다. 4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니 마침 교단총회 중이라 그립던 선배와 동역자들을 얼싸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반겼다.

그는 옥고를 통해 얻은 바가 많다. 성경을 암송하여 말씀이 마음에 충만하고 육체도 알맞게 살이 올랐다. 이제는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딜 자신이 생겼고 어떤 경우에는 순교할 각오까지 되어있어 참으로 감사했다. <끝>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