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원색적인 성결목회 활동

         류재하 목사

김태구 목사는 1972년(51세)에 도미하여 웨스턴복음주의신학교 대학원(M. Div)을 졸업한 후, 1976년에 산호세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다. 근처에 성결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불을 뿜는 듯한 그의 설교에 은혜에 갈급한 영혼들이 모여들었고, 수년 만에 교회 건물을 매입하였다.

그가 은퇴하기까지 15년 동안 20여 명의 청년들이 은혜와 사명 받아 목회자로 헌신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등 미주성결교회의 확장에 일조하였다.

또 그의 목회 중 국제성결대학 이사장과 학장까지 역임하여 성결한 목사들을 양성하였으며, 1990년 미주성결교회 제11대 총회장 직을 수행하면서 교단에 성결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후 1991년 원로목사로 추대 되었다.

재임 중 그는 근처 일본인 목사와 자주 만나 일본어로 신앙적 토론을 하다 그가 일본유학 중 일본인 목사의 영향으로 중생, 성결의 은혜 받은 것을 안 일본인 목사는 일본교회에서 목회하는 친구에게 초청토록 해 그는 일본교회 연합집회 강사로 몇 차례 초청 받아 은혜 끼쳤다.

그는 청년 때 일본에서 받은 은혜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소식을 들은 사중복음 중심인 미국의 CMA 교단의 초청을 받아 그의 신학적 연구와 체험이 깃든 사중복음에 대한 강의와 집회를 통해 CMA 목회자들에게 힘껏 전했다.

그 결과 선배들이 시작한 원색적인 사중복음을 한국인 성결교회 목사를 통해 다시 찾았다며 그를 계속 초청했다. 그는 미국으로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했다.

그는 50년 간 성공적인 목회자였고 성결은혜의 부흥사였으며,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그의 체험적인 중생과 성결론을 신학적으로 기틀을 확립한 권위 있는 성결론의 학자로 인정을 받아 LA에 있는 동양선교대학교에서 1999년 명예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그는 한국성결교회 초창기의 목사들처럼 중생과 성결을 뜨겁게 체험한 까닭에 그의 의식 속에는 사중복음에 대한 신앙으로 충만하였다.

그는 사중복음 중에서도 중생과 성결을 특히 강조했으므로 은퇴 후 교파를 가리지 않고 부르는 곳마다 가서 중생성결을 뜨겁게 전했다.

그는 신자들의 결혼식 주례사에도 반드시 중생과 성결의 복음이 있었고, 장례식에도 사중복음을 얘기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으로 맞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또한 어린이 돌잔치 축하 설교에서도 교회에 잘 다녀, 예수 믿어 새사람 되면 앞길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했다.

시대가 많이 달라 어떤 이들은 체험적 성결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자신이 확신한 구원의 복음을 불을 토하듯 전해 중생하지 않은 신자에게는 중생을, 성결을 모르는 신자에게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케 하는 능력의 복음사역자였다.

그는 성결의 복음만을 외치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동행하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총회대의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나 교단 정치에는 관심도 없어 회의 중 늘 눈 감고 기도 했으며, 가끔 동료들과의 모임에서도 교단의 정치적 이야기나 세상적 이야기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그가 평생 성결의 은혜와 삶이 매마르지 않은 이유는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능력이었다.

그는 평생 건강한 체구였으나 그가 사명을 완수하고 하늘 아버지의 부르심을 기도와 명상으로 기다리다가 2015년 3월 23일 믿음의 사람들로 크게 성장한 1남 5녀 가족들의 소망의 찬송 속에 94세 장수한 몸으로 하늘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사흘 후 미주성결교단의 총회장으로 천국환송 예배가 경건하게 드려져 참석자마다 큰 감동을 받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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