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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직을 사임한 황경찬은 충격을 받았지만 깊은 기도를 통해 곧 회복한 후, 그의 집 근처에 집을 얻어 ‘노량진성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다시 시작했다. 1961년 교단 총회에서 NCC 탈퇴문제로 보수파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보수동지회’를 구성한 후, NCC탈퇴를 계속 요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는 1958년 이미 보수적 교역자들의 초교파 모임인 ‘복음주의 동지회’(NAE)의 회장을 역임한 성결교회 보수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교단 분열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주의적인 신념이 있었기에 보수파들의 손짓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대신 분열하면서까지 NCC를 고집하면 안된다는 여론을 일으켜, 기성이 임시총회를 열어 NCC탈퇴를 선언케 했다. 그 후 보수파들을 만나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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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2.2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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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났다. 그는 가족과 함께 전에 숨어 살던 강원도 횡성으로 피신했다가 국군의 수복 후에 인천으로 돌아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자 가족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가 거제도 피란민교회에서 목회했다.서울신학교가 부산에서 임시로 개교하여 사명자들을 모집했고, 여전도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산에서 별과를 운영할 때 그는 별과 교수로 발탁되었다. 당시에 6.25전쟁으로 이건 교장을 비롯한 유능한 교수들이 신학교를 지키다 납북되는 등 교수요원이 심히 부족했는데, 평소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난 그가 교수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 국가 기관이 환도했고, 서울신학교도 그해 10월에 서울로 복귀했다. 그러나 신학교 건물이 반파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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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2.1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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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그가 대학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일본의 성결교회 순회목사로 온 곽재근 목사를 만나게 된다. 순회목사는 각 교회를 다니며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중생체험이 분명한 청년들을 설득해 교역자로 헌신케 하는 사명도 있었다. 곽재근 목사는 황경찬을 추천했고 그는 서울로 돌아가 성서학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당시 경성성서학원의 학제는 3년 6학기제를 변경하여 1년에 3개월 수업을 한 후, 나머지 9개월은 각 교회에 가서 전도하거나 개척하게 했다. 즉 1년에 3개월의 학습과 9개월의 전도실습이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 해마다 사명있는 신학생들을 통해 50여 교회나 개척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기도 했다.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원칙을 준수하는 그는 항상 학업성적이 우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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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2.0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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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철저했다. 술이나 담배를 끊은 후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와서는 가족들을 깨워 가정예배를 드렸고 틈틈이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러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된 큰아버지는 겨울마다 한 달 간 개최하는 노회의 성경학교에 다녀 은혜와 말씀으로 무장하였으며 농촌에 다니며 전도를 하다 마침내 장로가 되었다. 이런 큰아버지의 경건한 생활이 어린 경찬의 생활에 배어들어 큰 영향을 주었다.경찬이는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며 1924년 보통학교 졸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주일학교 반사와 성가대원으로 임명되어 봉사했다. 그는 평양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약해 평생 농사를 짓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5년제 중등과정인 농업학교 3학년에서 중퇴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일이 막막했다. 그는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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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12.0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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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찬은 1908년 12월 18일(음) 평안남도 안주의 작은 마을 신향리에서 부친 황주형과 모친 문주애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태어나자 모두가 기뻐했고, 어머니는 딸들보다 더 아끼고 사랑을 쏟았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훤하게 잘생긴 그는 가족은 물론 가문의 희망이었다.그는 영리하고 탐구심이 강해 보는 것마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불쑥 컸으나 몸이 호리호리하게 말라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밥을 많이 먹도록 했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 듯 항상 음식을 조금만 먹고 수저를 놓아 어머니를 애타게 했다. 이런 식생활 습관이 평생토록 계속되어 그가 100세를 향수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1914년, 6살이 된 그는 가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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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1.2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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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결교회 총회 부회장인 곽재근 목사는 전성기에 이른 조선성결교회의 민선 최고지도자로서, 성결교회 본부와 교회, 교역자 사이의 크고 작은 일들을 믿음과 덕과 사랑으로 성심껏 도와주었고 모든 행동과 말을 조심했다. 그는 모든 일에 원만하고 그르침이 없었기에 제2회 총회(1934)에서도 부회장에 당선되었다.비록 동양선교회 선교부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선성결교회의 교역자와 교회지도자들은 자율적으로 총회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역교회들은 교회재정의 자립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자급자립을 선언하는 교회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하여 1932년 총회 창립을 위한 결의에서 1935년 3월 제3회 총회 개최 시까지를 조선성결교회의 전성기라고 일컫게 되었다.호사다마(好事多魔)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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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1.1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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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근 목사는 1928년 3월 13일부터 열린 제5회 연회에서 교단기관지 활천의 기자로 임명되어 1935년 5월까지 약 8년 동안 일했다. 그는 다달이 발간되는 교단기관지인 활천에 설교와 논단, 때로는 지방교회순회기를 써서 전국교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곽 목사는 기자가 되던 1928년 11월호부터 22편의 설교를 통해 뛰어난 설교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곽 목사는 1934년 6월 27일 저녁 서울YMCA 강당에서 열린 ‘성서신앙대강연회’에서 ‘성서적 신앙의 공효(功效)’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회는 조선성결교회가 처음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것인데, 매일 밤 모여들어 경청하는 700여명의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곽 목사는 1928년 제5회 연회에서 서대문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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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1.1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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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결교회는 1922년 4월 제2회 교역자 간담회에서 국내외에 순복음을 전하자는 목적으로 전도국을 조직했다. 경성성서학원에서 수학하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학생 2~3명이 함경도에 교회 개척을 요청했고, 동양선교회 본부는 1926년 4월 곽재근 전도사를 개척자로 파송했다.곽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는 북청출신 이정원 부임전도사와 신광빈 전도부인과 함경남도 북청으로 내려갔다. 북청에 도착한 후 전도계획을 짜고 사립 북청극명학교의 교실 한 칸을 예배처소로 빌려 대거전도회를 열었다. 3명의 전도사는 5월 22일부터 1주일 동안 밤에는 길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고 낮에는 인근마을 장터를 찾아 시장전도를 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결신자 90명을 얻었고 6월 12일에 창립예배를 드리니 새 구도자 20여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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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11.0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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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월 곽재근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동양선교회본부의 파송을 받아 충청남도 홍산교회에 부임했다. 25세의 청년전도사가 된 것이다. 홍산교회는 전성운 전도사가 1915년 8월 4일에 개척하여 1년 만에 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여 입당한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는 때였다. 이 교회는 교인들끼리 유무상통하며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곽 전도사는 주임전도사의 지도를 받아 최재운 전도부인과 같이 홍산 인근의 각 마을을 찾아다니며 축호전도를 했다.홍산교회는 매 주일마다 모여드는 신도들로 차고 넘쳤다. 그래서 남쪽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야위’라는 곳에 지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곽재근 전도사를 주임교역자로 파송했다. 바야위는 충청남도에서도 매우 외지고 으슥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의 성품도 옹색하여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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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10.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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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근(郭載根)은 1893년 7월 9일(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부친 곽유익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인근에 이름난 한학자였고 부친 역시 한학자인 선비로 알려져 있다. 재근은 선비집안의 자손답게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다. 4살 때 한문을 깨우치고 7살의 어린나이에 사서삼경까지 통달, 운자를 대면 한시(漢詩)도 척척 지어서 신동으로 불리었다. 15살이 되자 당시 일찍 결혼하는 풍습에 따라 같은 면의 백동진 씨의 셋째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께서, “재근아, 너 순안으로 가서 공부하여라”라고 말씀하셔서 이에 순종했고 재근은 혼자 순안으로 가서 의명중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재근을 순안으로 유학을 시키기까지는 이모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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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10.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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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첫 번째 죽음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서원해서 살았고, 두 번째로 연탄가스의 중독에서 회개의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나이가 45세여서 당장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딸들이 고교에 다니고 아들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전련총무를 버리고 신학교에 가고,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그는 기도하면서 목사가 되지 않더라도 전련의 총무로 전도 사업을 통해 영혼을 많이 구원하는 것이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전련의 전도 장로가 되고 전속 부흥사역을 담당,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국을 누비며 영혼구원에 전력을 다했다.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역시 달랐던 것일까? 1974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 황경찬 총회장의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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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10.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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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나 장로로 교회학교, 성청, 남전도회 전련 등에서 열심히 교단 부흥을 위해 일하는 민의식 장로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날마다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사람들도 누구나 그렇게 인정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는 다르셨던가 보다.1971년 11월. 남전도회 경기지역 대전도대회가 경기 광주에 있는 큰 교회에서 개최되던 때였다. 지금은 그곳이 성남시에 속하지만, 당시는 광주군에 속해 있었다.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도시사업으로 정비하면서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광주읍의 모란지역의 땅을 개발하여 이주하던 시절이었고, 주민들의 마음이 정착되지 못한 것을 복음으로 사로잡을 기회였다.당시 남전도회 전속 강사 이명수 목사를 강사로 전국 남전도회 임원들이 이 일에 적극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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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10.0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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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군목시험 신체검사에서 늑막염으로 탈락한 이만신 전도사가 부평 처가에서 정양 중이었고 이를 알게 된 조병두 목사가 부평신촌의 개척교회에 부임하게 했다. 이 전도사의 열심 있는 목회로 교회가 서서히 부흥되자 민근식은 성청과 주일학교 연합회 운동에 나섰다. 적극적인 활동으로 그는 성청경기지련회장을 5년 연속 재임하여 청년연합회 발전의 토대를 닦았고, 주일학교 경기지련회장도 2년 간 재임하여 터전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평소 그의 열심 있는 전도활동을 지켜보던 조병두 목사가 어느 날 그를 불러 신학교에 갈 것을 권면했다. 민근식은 조 목사의 권면에 따라 서울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교역자가 되기에 자신이 없고 흠도 많다고 느껴 결국 3학년 중도에 하차하고 말았다. 민 집사는 이후 1965년부터 남전도회전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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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편집위원장
2010.09.2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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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근(의)식 내외가 부평으로 온 후 조남섭 집사는 자신이 다니는 부평제일교회의 사찰로 일하도록 담임목사의 허락을 받았다. 일에 관계없이 일단 도시에 오니 숨통이 트여 좋았다. 그는 교회 사찰의 방에 짐을 풀고 교회를 청소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회 밖을 주로 청소하고 예배시마다 종을 치면 아내는 교회 안을 쓸고 닦았다.그의 일은 새벽 4시부터 시작했다. 새벽기도회 30분 전에 일어나 종을 치는 동안 아내가 일어나 교회마루를 쓸고 닦는다. 여름에는 괜찮지만, 겨울에는 추운 새벽에 종을 치고 난로에 땔감을 넣어 불을 피우는 일이 여간 힘 드는 게 아니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수고에 비해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새벽기도회 종을 칠 때마다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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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9.1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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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식(閔義植)은 1927년 8월 8일(음) 충북 진천군 만승면 월곡리에서 농부 민영근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근식(根植)이다. 그는 부친을 닮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또래들 보다 키도 커서 골목대장이었다. 그는 보통학교를 다니다 10살 때 부모를 따라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하여 안성보통학교로 전학했다.어머니가 전도를 받아 안성성결교회를 다녔고 어머니는 남편도 전도해서 온 가족이 신자가 되었다. 그는 성탄절 행사의 노래나 연극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대중 앞에 서서 발표하는 담력을 키웠다. 또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무슨 일이든지 앞장서서 일하여 아이들의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가 지배하는 시대여서 아무리 뛰어나도 일본인 선생이 반장은 일본인 아이만을 시키는 바람에 반장 한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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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9.0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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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목사의 장남 승욱은 1951년 평양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 남으로 넘어온 둘째 아들 승만은 목회자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셋째 아들 승규는 대기업에서 일한 후 지금은 사회복지에 전념하고 있다. 북에는 김송희 사모와 4명의 딸들이 남았고, 1978년 이승만 목사는 북한을 방문해 28년 만에 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승만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과 동생들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승만아! 네가 아버지가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승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친에 이어 소명의 길을 가겠다고 서원했고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월남해서 5년간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미국군사유학과 중앙신학교 야간부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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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9.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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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성도들이 이태석 목사의 행방을 찾기 위해 평양 시내 곳곳을 찾아 헤맸다. 경찰서와 관공서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가족들은 공산군이 퇴각하면서 목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넣고 사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송희 사모는 정신없이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묻혀있다는 곳마다 찾아다녔다. 다음 날 10월 21일, 50여구의 시체가 뒤엉켜 매몰되어 있는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한 모퉁이 방공호 속에서 사살된 이태석 목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목사는 가슴과 어깨에 총탄을 맞고 몸은 쇠줄로 묶인 채 운동장에 눕혀져 있었다. 납치인사들을 한데 몰아넣고 이들을 살해한 것이다.그의 얼굴은 아주까리 이파리로 덮여있었다. 온가족과 성도들이 이태석 목사의 싸늘한 시신을 붙잡고 얼마간을 모르게 울었다. 이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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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8.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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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교회는 대전지방 김응조 감리목사와 대전교회 권보옥 전도부인, 청주교회 장원초 목사, 일본인 오다 나리찌(한국명 전영복) 전도사 등을 초청하여 22일 밤 김응조 목사의 집례로 봉헌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이 때 40여 원의 헌금이 드려졌다. 이후 1주일 동안 부흥 전도회를 열고 새벽기도회, 오전에 사경회, 오후에 소아부흥회, 밤에 전도 강연회, 이렇게 매일 네 번씩 집회를 하였다. 놀라운 성신의 역사로 매 시간 시간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새로 믿기로 결심한 자 50여 명을 얻었다. 김응조 목사는 이 기간 남녀신자 10명에게 학습예식을 거행했다.금산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 제목을 바꿔 전도부인 주시기를 합심 기도하였고 그 결과 6월 말 하나님께서 전도부인을 보내주셨다. 당시 금산교회의 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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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8.1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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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은 이 씨 가문에 첫 기독교신앙을 전수한 어머니 김효신에게 감화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서 신학수업을 했다. 김효신은 이태석의 아버지 이인백과 결혼하여 평양시 서성리 보통문 근처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김효신이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유교를 숭상해오던 이 씨 가문의 첫 기독교인이 되었다. 김효신은 신앙생활을 시작부터 철저하게 했고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 웃어른들과 남편의 극렬한 박해를 받았다. 남편은 김효신이 교회로 걸어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다리를 묶어놓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때려서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김효신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 집을 나온 김효신은 미국인 선교사의 집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성경공부와 신학입문교육을 받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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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8.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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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李泰錫) 목사는 3·1운동 때에 선두에서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고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농촌 아동들을 위해 훈도 일을 맡아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특히 이태석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평양 상수리교회, 신암교회를 담임하면서 공산당의 집요한 핍박에도 흔들림이 없이 꿋꿋하게 목회자의 소임을 다했다.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주변의 동료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이 목사에게 월남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이 목사, 이제 이북에서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 없어요. 언젠가는 그들이 다 죽일 겁니다. 아직 국경이 느슨할 때 빨리 가족들을 데리고 월남하세요. 곧 국경이 닫힐 겁니다.” 하지만 목회의 사명에 투철한 이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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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8.04 1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