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목사의 순교

금산교회는 대전지방 김응조 감리목사와 대전교회 권보옥 전도부인, 청주교회 장원초 목사, 일본인 오다 나리찌(한국명 전영복) 전도사 등을 초청하여 22일 밤 김응조 목사의 집례로 봉헌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이 때 40여 원의 헌금이 드려졌다.

이후 1주일 동안 부흥 전도회를 열고 새벽기도회, 오전에 사경회, 오후에 소아부흥회, 밤에 전도 강연회, 이렇게 매일 네 번씩 집회를 하였다. 놀라운 성신의 역사로 매 시간 시간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새로 믿기로 결심한 자 50여 명을 얻었다. 김응조 목사는 이 기간 남녀신자 10명에게 학습예식을 거행했다.

금산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 제목을 바꿔 전도부인 주시기를 합심 기도하였고 그 결과 6월 말 하나님께서 전도부인을 보내주셨다. 당시 금산교회의 교세현황은 남녀 교역자 1인씩, 남녀집사 1인씩, 세례교인 6인, 학습교인 13인, 90여명의 구도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태석 목사는 금산교회를 건축하고 활천 제10권(1932년 11월호)에 ‘금산성결교회당 신건축기’를 기고하여 모든 교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1933년 강경교회로 임지를 옮겨 목회를 하다가 1936년 다시 금산교회에 재부임, 전심전력을 기울여 목회를 했다. 이태석 목사의 설교는 지적이고 논리적이며 교육적인 차분한 설교였다. 하지만 속에는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역력했다.

이 목사는 1945년 해방 이후 평양상수리교회(혹은 평양제일교회)와 신암교회를 담임하면서 공산당의 집요한 탄압과 핍박 속에서도 목회자의 소임을 다했다. 평양상수리교회는 1926년에 설립된 교회로서 변남성 목사가 담임으로 사역하던 1936년 11월 성결교단을 이탈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한 곳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태석 목사는 당시 하나님의 교회 소속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주변의 동료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이태석 목사에게 월남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하지만 이태석 목사는 단호하게 월남을 거절했다. “내가 목회자로서 나만 살겠다고 어떻게 양떼를 버린다는 말입니까?” 이태석 목사는 북한 공산정권의 집요한 탄압과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에 모여드는 적은 무리의 성도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 목양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다’는 각오로 일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하여 계속 북진하였고 공산군은 전열이 흐트러지고 무기력해져 북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당시 평양에는 유엔군의 군용기가 자주 날아와 폭탄을 투하했다. 이때 이태석 목사의 가족은 폭격이 심한 평양을 떠나 가까운 시골 평안남도 강서로 피난을 갔다. 20세 안팎의 승욱, 승만, 승규 삼형제는 평양에서 숨어 지내도록 했다.

이태석 목사는 숨어있는 세 아들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가끔씩 평양에 돌아와 보곤 하다가 10월 11일 평양에서 후퇴 중이던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었다. 목사의 신분임을 알게 된 공산당 간부는 이태석 목사의 온 몸을 쇠사슬로 꽁꽁 묶었고 급하게 도주하면서도 인정사정없이 채찍질을 가하고 구둣발로 걷어차며 곤욕을 주었다.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과 국군이 대동강을 건너 평양시내에 입성했다. 이태석 목사의 가족들과 성도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입성을 맞이하는 군중대열 속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그러나 체포된 이태석 목사는 이 기쁜 평양 입성 환영의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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