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에서 벼락을 맞고 목회자로 변신

그는 첫 번째 죽음의 갈림길에서 하나님께 서원해서 살았고, 두 번째로 연탄가스의 중독에서 회개의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나이가 45세여서 당장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딸들이 고교에 다니고 아들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전련총무를 버리고 신학교에 가고,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목사가 되지 않더라도 전련의 총무로 전도 사업을 통해 영혼을 많이 구원하는 것이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전련의 전도 장로가 되고 전속 부흥사역을 담당, 전보다 더욱 열심히 전국을 누비며 영혼구원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은 역시 달랐던 것일까? 1974년 5월 25일이었다. 당시 황경찬 총회장의 초청으로 총회본부 직원들 10명이 처음으로 서울 창경원으로 야유회를 갔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내려 직원들은 각기 우산을 쓰고 창경원에 가서 총회장이 제공하는 점심을 먹은 후, 당시 창경원에 있는 동물원 구경을 하고 났을 때 갑자기 번개가 일고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당시 총무인 이봉성 목사가 각자 집으로 가도록 지시하자, 민 장로는 당시 교회학교전련 간사인 이종무 목사와 함께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들은 이봉성 목사의 뒤를 따라 가던 중 폭우가 너무 심해 비를 피하려고 큰 나무 밑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하는 번개 빛이 보이더니 그들은 비가 흥건하게 고인 땅바닥에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이 총무가 달려와 비를 맞으며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어 깨웠지만 깨어나지 않았고 급하게 군에서 배운 응급호흡을 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경찰을 급히 불러 경찰 지프에 두 사람을 태워 창경원 근처인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의사의 긴급한 응급조치에 따라 몇 시간 후, 두 사람은 의식을 찾았지만 온 몸이 화상을 입어 고통이 심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하게 벼락을 맞았고 벼락은 우산의 철을 타고 손에 화상과 손목의 시계를 태우고, 발뒤꿈치 구두 뒷굽을 태우고 나간 것이다. 특히 민 장로는 가슴에 전류가 흘러 까맣게 동전만한 자국이 남겨졌다.

이튿날 동아일보에 ‘목사가 벼락을 맞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목사와 장로가 왜 벼락을 맞을까? 하는 의구심을 제시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온 몸이 찢기는 아픔 속에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자, 민 장로는 다시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한 후, “죽어도 (천국에 가니) 좋고, 살면 더 좋습니다. 그래도 20년만 더 살게 해주시면 늦었지만 정말 목사가 되겠습니다”라고 눈물로 간구했다.

두 사람은 빠르게 회복되어 한 달 반 만에 퇴원했다. 퇴원하는 날, 의사가 “이제까지 벼락 맞은 환자 중에 산 사람은 당신들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다”고 감탄하는 말을 했다. 퇴원 후 민 장로는 야간 장로교신학교에 편입, 졸업과 함께 남전도회 전련총무를 사임하고 광주 번천성결교회 담임전도사로 50세에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한 후, 1981년에 성결교단에 돌아와 성남에 일심교회를 개척했다. 일심(一心)은 ‘오직 목회’ 라는 한 마음으로 산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교회가 성장하자, 그는 부흥강사로도 활동하다 67세인 1993년 10월 9일에 지병으로 소천했다. 벼락을 맞고 간구한지 20년 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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