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과정

이태석(李泰錫) 목사는 3·1운동 때에 선두에서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기도 했고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농촌 아동들을 위해 훈도 일을 맡아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

특히 이태석 목사는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평양 상수리교회, 신암교회를 담임하면서 공산당의 집요한 핍박에도 흔들림이 없이 꿋꿋하게 목회자의 소임을 다했다.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주변의 동료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이 목사에게 월남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이 목사, 이제 이북에서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 없어요. 언젠가는 그들이 다 죽일 겁니다. 아직 국경이 느슨할 때 빨리 가족들을 데리고 월남하세요. 곧 국경이 닫힐 겁니다.” 하지만 목회의 사명에 투철한 이태석 목사는 단호하게 월남을 거절했다. “내가 목회자로서 나만 살겠다고 어떻게 양떼를 버린다는 말입니까?”

이태석 목사는 공산정권 치하의 탄압과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교회에 모여드는 적은 무리의 성도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서라도 목양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다는 결사각오로 성도들을 돌봤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목회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다가 50세의 젊은 나이로 공산당의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이태석 목사의 시신은 50여구의 시체가 뒤엉켜 매몰되어 있는 방공호 속에서 사살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 목사는 가슴과 어깨에 총탄을 맞고 몸은 쇠줄로 묶인 채 운동장에 눕혀졌다. 이 비극적인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이태석 목사는 공산당의 회유와 생명의 위협 앞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의연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공산당은 망한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오히려 회유하는 공산당을 향하여 외쳤다”고 한다(한국기독공보 1984년 7월 21일 제1515호).

이태석 목사는 1901년 7월 17일,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내리에서 대대로 유교를 숭상해온 부친 이인백(李仁伯)과 모친 김효신(金孝信)의 두 형제 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이후 그는 장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신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경신중학교 재학 중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8세의 나이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이때에 민족에 대해 눈을 뜨고 민족독립에 대한 강렬한 사명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독립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피신하여 그곳 태탄사립학교에서 농촌아동들의 훈도 일을 맡아 나라사랑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 후 평양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 그는 20세 되던 해에 평양숭실중학교에서 ‘학생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년 후에 석방되자 다시 숭실중학교에 복학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 학업의 길이 막히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명교중학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에 정진하여 일본의 명문인 동경의 중앙대학 예과를 거쳐 상과를 졸업했다.

1927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평양 서문통 거리에서 약품도매업인 신창당약국을 경영하는 김병필의 9남매 중 둘째 딸 김송희와 결혼했다. 김송희는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제16회로 졸업하고 평양근교의 칠골 소학교와 신의주근방 피현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이태석은 그의 형 이군석과 사업을 했고 부인 김송희는 결혼한 후에도 평안남도 안주의 대명학원 교무주임이 되어 교편생활을 계속했다. 이렇게 각기 직업에 충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다가 이태석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복음전파의 사역자로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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