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과 서울신학교 교수 사역

1950년 6.25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났다. 그는 가족과 함께 전에 숨어 살던 강원도 횡성으로 피신했다가 국군의 수복 후에 인천으로 돌아왔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자 가족과 함께 부산까지 내려가 거제도 피란민교회에서 목회했다.

서울신학교가 부산에서 임시로 개교하여 사명자들을 모집했고, 여전도사를 양성하기 위해 마산에서 별과를 운영할 때 그는 별과 교수로 발탁되었다. 당시에 6.25전쟁으로 이건 교장을 비롯한 유능한 교수들이 신학교를 지키다 납북되는 등 교수요원이 심히 부족했는데, 평소 잘 가르친다고 소문이 난 그가 교수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 국가 기관이 환도했고, 서울신학교도 그해 10월에 서울로 복귀했다. 그러나 신학교 건물이 반파되어 OMS의 도움으로 수리한 후에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는 1957년에 서울신학교 교수 겸 학생과장으로 취임했으며 기숙사 사감을 겸임했다. 원칙주의자로서 그는 학생지도와 함께 기숙사생활을 원칙에 따라 엄격한 규율을 정하고 중세시대 수도원처럼 운영하기 위해 힘썼다.

1957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기숙사에 입사한 후, 사감인 황 목사의 지침에 따라 규칙적인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그는 매일 오전 5시마다 원우회 간부들을 통해 기숙사 각 방문을 두드려 잠을 깨우고, 강당에서 진행하는 새벽기도회에 의무적 참석을 독려했다. 피곤할 때는 깨우는 것이 짜증스러웠지만 평생 새벽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 교역자 훈련이기에 잘 적응하려고 학생들은 노력했다.

또한 저녁 9시가 되면 의무적으로 각 방의 전등을 꺼야했다. 물론 당시 국가적으로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하여 절전이 요청되었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밤을 새울 수도 있을 터, 원우회 간부들을 통해 소등하지 않은 방문을 두드려 억지로라도 소등을 하게 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학생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편지검열이었다. 외부로부터 학생들에게 오는 편지는 일단 학생과장실에 배달되었다. 그는 편지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핀 후, 여자의 이름으로 오는 편지는 반드시 학생을 불러서 확인했다. 그 중에는 어머니나 누이들의 편지도 있었고, 방학 중에 봉사하다 온 지방의 여학생들의 편지도 있었다. 먼저 여자와 무슨 관계인지 자세히 묻고 혐의가 벗어지면 그 편지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아무리 신학생이지만 엄연히 통신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는 것에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초창기 때부터 지켜 온 학교의 전통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황 목사 자신도 과거 기숙사에서 그런 간섭을 받아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자유의 물결과 함께 전국은 다양한 학생시위와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힘을 얻은 신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후, 강당에 모여 금식기도회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핵심 요구사항을 강당 뒷벽에 크게 써서 붙였다.

요구사항은 5가지였고 그 중 하나가 편지검열의 폐지였다. 그리고 남녀 기숙사 사감 두 사람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연일 교수회의가 열려 찬반 토의가 진행됐고 결국 사흘 만에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 황 목사는 교수가 된지 4년 만에 교수와 사감을 함께 물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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