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죽을 고비 마다 헌신의 기도
집사나 장로로 교회학교, 성청, 남전도회 전련 등에서 열심히 교단 부흥을 위해 일하는 민의식 장로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날마다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사람들도 누구나 그렇게 인정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는 다르셨던가 보다.
1971년 11월. 남전도회 경기지역 대전도대회가 경기 광주에 있는 큰 교회에서 개최되던 때였다. 지금은 그곳이 성남시에 속하지만, 당시는 광주군에 속해 있었다.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도시사업으로 정비하면서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광주읍의 모란지역의 땅을 개발하여 이주하던 시절이었고, 주민들의 마음이 정착되지 못한 것을 복음으로 사로잡을 기회였다.
당시 남전도회 전속 강사 이명수 목사를 강사로 전국 남전도회 임원들이 이 일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 일에 실무를 전련 총무 민의식 장로가 지휘하여 하루에 3번씩 집회 시작하기 1시간 전부터 북을 치고 노방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다. 첫날 저녁부터 많은 미신자들이 참석해서 믿겠다고 손을 드는 등 성과가 있었다. 사흘 동안 그대로 계속하면 큰 성과가 있을 것을 누구나 확신했다. 그 중에서도 민의식 장로는 자신감이 충만하게 광고했다.
첫날 집회를 마치고 늦은 밤에 여관을 찾아 투숙한 민 장로는 새벽녘에 방 구들사이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행히 옆방에서 새벽기도회룰 인도하기 위해 나온 강사가 민 장로의 방을 노크하다가 대답이 없자, 문을 열고 혼수상태에 빠진 민 장로를 업고 근처의 병원에 달려가 응급실에 입원시켰다. 강사는 그를 남전도회 경기지련의 임원에게 돌보도록 맡기고 교회로 뛰어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새벽기도회 설교를 마친 강사와 큰 교회의 김 목사가 함께 급히 병원에 갔다. 의사가 응급치료를 해서 입에서 토악질을 한 흔적이 있지만 민 장로는 그때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민 장로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번 전도대회는 중지할 수밖에 없어 큰 낭패였다. 그래서 두 목사가 민 장로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한 후, 찬송을 크게 부르고 또 불렀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민 장로가 찬송소리를 듣고 서서히 의식을 찾으며 깨어났다. 3시간 만에 깨어난 그를 보고, 담당 의사가 기적이라며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고 놀랐다. 그동안 자기의 병원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수십 명을 치료했었지만 한 사람도 못 살고 다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민 장로는 과거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했던 것을 깨닫고 무의식 속에서 회개기도를 했다고 했다.
과거 서원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1964년 부평제일교회 사찰집사로 일하던 민 집사가 은혜 받아 중생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본 조병두 목사가 부평 인근 당시 김포군 계양면에 지교회 승천교회를 개척하고, 그를 전도인으로 파송했다. 그는 1년 동안 열심히 전도하고 땅을 매입하여 작은 교회까지 건축했다. 어느 날 그가 무거운 역기를 들고 운동을 하다 그만 넘어지며 허리를 크게 다쳤고 병원에서 부러진 척추 일부를 잘라내고 엉덩이뼈를 잘라 봉합하는 대수술을 했다.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2년 동안 누워 통증과 절망으로 죽음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주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헌신기도를 했다. 그리고 현신애 권사의 용산집회에 아내의 부축 받아 가서 안수기도를 받는 순간, 불 같이 뜨거운 신유역사를 체험했다. 갈 때는 누워서 갔지만 올 때는 걸어서 집으로 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