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가에서 시작된 첫 목회지 바야위교회

1917년 1월 곽재근은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동양선교회본부의 파송을 받아 충청남도 홍산교회에 부임했다. 25세의 청년전도사가 된 것이다.

홍산교회는 전성운 전도사가 1915년 8월 4일에 개척하여 1년 만에 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여 입당한지 불과 몇 개월 되지 않는 때였다. 이 교회는 교인들끼리 유무상통하며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곽 전도사는 주임전도사의 지도를 받아 최재운 전도부인과 같이 홍산 인근의 각 마을을 찾아다니며 축호전도를 했다.

홍산교회는 매 주일마다 모여드는 신도들로 차고 넘쳤다. 그래서 남쪽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야위’라는 곳에 지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곽재근 전도사를 주임교역자로 파송했다. 바야위는 충청남도에서도 매우 외지고 으슥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의 성품도 옹색하여 좀처럼 딴 고장에서 온 사람들과는 화합하지 않았다.

이런 여건 속에서 곽 전도사 내외는 개척초기에 무척 고생을 했다. 예배당을 구하지 못하여 마을에서 버려진 흉가 한 채를 사서, 살림집 겸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마을사람들은 아무리 권유해도 흉가로 알려진 집에 예배하러 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이 흉가는 속칭 구렁이집으로 이름난 집이었다. 큰 구렁이와 뱀들이 득실거리고 밤이면 기어 나와 사람을 해치려는 바람에 비워둔 집이었다. 동네에서는 이 집을 무서워하며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집을 사가지고 온 곽 전도사 내외는 어린애를 데리고 마루방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큰 구렁이가 기어 나와 스르륵스르륵 소리를 내며 창문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깜짝 놀라 잠을 깬 곽 전도사는 얼른 불을 켜고 아내와 어린아이를 다른 방으로 피신하게 한 후 관솔에다 불을 붙여 들고, 몽둥이를 들고 나갔더니 구렁이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무서운 첫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 나가보니, 집 안팎에 풀들이 무성하여 정말 유령의 집과도 같았다. 곽 전도사는 몽둥이를 옆에 차고 낫을 들고 집 주위와 부엌 등 무성한 풀들을 말끔히 베어버렸다. 풀 속에 숨어있던 작은 뱀들은 보는 대로 몽둥이로 때려잡았다. 그러나 어젯밤에 본 그 큰 구렁이는 어디에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큰 구렁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그날 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사모는 “무서워 못 살겠다”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전도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니 염려할 것 없다”고 사모를 안심시켰다. 3~4일이 지난 어느 날, 낮에 사모가 애기를 업고 마당에 나가니 그 큰 구렁이가 담 모퉁이에 똬리를 튼 채 목을 추겨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사모가 소리를 질렀다. “여보! 여보! 그 구렁이가 저, 저기…” 사모의 다급한 비명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곽 전도사는 얼른 몽둥이를 들고 마당구석 담 밑에 도사린 구렁이에게 달려갔다. 도망치려는 구렁이의 머리를 겨냥해 일격을 가했다. “꽥” 구렁이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비실거렸다. 연속적으로 내리친 몽둥이질에 큰 구렁이도 얼마 후 숨이 멎고 말았다. 몸뚱이가 두 손으로 겨우 잡을 만큼 굵었고, 길이는 5자를 넘을 듯 했다.

이 사건 후에도 주일 아침과 삼일 저녁 전이면 곽 전도사와 사모는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집집마다 찾아가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큰절을 올리며 권유했다. 그러기를 6개월이 지나서 한 사람씩 예배당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해가 지나자 30명이 넘는 마을사람들이 등록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빨리 교회가 성장하기는 이 충남의 산골마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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