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으로 나뉜 유족의 삶

이태석 목사의 장남 승욱은 1951년 평양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 남으로 넘어온 둘째 아들 승만은 목회자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셋째 아들 승규는 대기업에서 일한 후 지금은 사회복지에 전념하고 있다. 북에는 김송희 사모와 4명의 딸들이 남았고, 1978년 이승만 목사는 북한을 방문해 28년 만에 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승만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과 동생들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승만아! 네가 아버지가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승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친에 이어 소명의 길을 가겠다고 서원했고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월남해서 5년간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미국군사유학과 중앙신학교 야간부에서 수학했다. 제대 후에 도미하여 데이비스 엘킨스 대학, 루이빌신학교, 예일대학 신학부, 시카고신학교 종교사회학박사 학위 취득 등 학문을 쌓았으며, 대학 교수 및 교목, 보스턴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턴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이후 미국교회협의회(NCC USA)회장을 역임했고, 유니온신학교 선교학 교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미국장로교 212차 총회장 등을 역임한 미국 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셋째 아들 승규는 해병대에서 군무를 마치고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학과를 졸업하여 여러 대기업체에서 크게 활동했다. 그리고 대전 시립장애인 종합복지관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사회복지법인(장애인 종합시설) 성재원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한강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으며 소망교회 초대장로, 대전 대덕교회 장로로 은퇴했다.

북에 남은 김송희 사모와 4명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는 1978년 북한을 방문한 이승만 목사가 28년 만에 만난 동생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이승규 장로에게 보낸 여동생들의 육필로 쓴 편지를 통하여 보다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1989년 막내 여동생 경복, 1992년 둘째 여동생 경옥, 1999년 첫째 여동생 경신이 남한의 작은 오빠 이승규 장로에게 소상하게 쓴 육필편지를 보냈다.

김송희 사모는 두 아들을 남쪽으로 떠나보낸 후 자주 남쪽하늘을 바라 봤는데 항상 그의 눈길이 흐려져 있었다. “우리 아들들은 효자였다. 조국이 통일되면 모두 큰 어른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사모는 그토록 통일을 바라고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다.

1960년 6월, 서성리 집에서 명령을 받아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했다. 김송희 사모는 조국의 분단된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순교한 남편 이태석 목사를 천국에 먼저 보낸 뒤에 두 아들 승만과 승규를 남으로 보내고 딸 네 명과 함께 신앙을 남몰래 지키고 살다가 1970년 12월 6일 매섭게 추운 겨울날에 둘째딸 이경옥의 집에서 뇌출혈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했으나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승만아…, 승규야…”를 외치고 주님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며 천국으로 돌아갔다.

네 명의 딸들은 현재 북에서 살고 있으며 어린 시절에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교회가 없어서 교회생활은 못하지만 자기들 스스로 비밀리에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있다.

장녀 이경신(1935년 2월생)은 평안남도 강서, 차녀 이경옥(1939년 6월생)은 함경남도 함흥, 삼녀 이경주(1942년 8월생)는 함경남도 함흥시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녀 이경복(1950년 4월생)은 의사가 되어 함경남도 함흥에서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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