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도회 전련 총무로 전도중심의 정체성 확립

그때 마침 군목시험 신체검사에서 늑막염으로 탈락한 이만신 전도사가 부평 처가에서 정양 중이었고 이를 알게 된 조병두 목사가 부평신촌의 개척교회에 부임하게 했다. 이 전도사의 열심 있는 목회로 교회가 서서히 부흥되자 민근식은 성청과 주일학교 연합회 운동에 나섰다. 적극적인 활동으로 그는 성청경기지련회장을 5년 연속 재임하여 청년연합회 발전의 토대를 닦았고, 주일학교 경기지련회장도 2년 간 재임하여 터전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평소 그의 열심 있는 전도활동을 지켜보던 조병두 목사가 어느 날 그를 불러 신학교에 갈 것을 권면했다. 민근식은 조 목사의 권면에 따라 서울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교역자가 되기에 자신이 없고 흠도 많다고 느껴 결국 3학년 중도에 하차하고 말았다. 민 집사는 이후 1965년부터 남전도회전련 창립총회에 경기지방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적극 지원했다. 당시 무교동 총회본부에 남전도회 사무실이 설치된 후에 그는 1967년부터 8년 간 남전도회 전국연합회 총무로 선출되어 교단의 발전을 위해 눈부시게 활동했다.

그는 남전도회전련 제2대 총무로 부임하면서 남전도회 본연의 임무인 전도활동을 강화하는 것에 힘썼다. 뚝심과 추진력이 강한 그가 이를 밀어 붙이자 이상하게 협조가 잘 되지 않았다. 이유는 임원이 모두 장로들인데 총무는 집사라는 점이 작용한 듯 했다. 이를 알고 부평신촌교회 이만신 목사가 이듬해(1968년) 5월 이익범 집사와 함께 장로장립을 받게 했다. 장로안수를 계기로 그는 이름을 민의식으로 고쳤다. 예수의 의를 심는다는 뜻이다. 그런 때문인지 이때부터 남전도회 임원들의 협조가 잘되어 연합회가 활기를 띄었다.

그의 남전도회 총무 활동 8년은 전반기(67~70년)와 후반기(71~74년)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기는 주로 문서전도운동, 순회전도사 파송, 미조직 남전도회 조직화, 남전도회 회보발간, 지방연합대회 개최 등 조직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다. 이 중 순회전도자 파송은 당시 부흥회를 개최하지 못하는 미자립 농어촌교회에 남전도회 전임부흥사를 파송하여 무보수로 집회를 인도하여 각 교회부흥에 기여했다.

제1대 전임부흥사는 전용환 목사, 제2대는 이명수 목사, 제3대는 민의식 장로였다. 전임부흥사가 가는 곳마다 은혜가 임하여 회개의 역사와 신자들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역사로 담임 교역자들이 보낸 감사편지와 성과가 남전도회 회보에 계속 실려 교단의 발전에 공헌했다.

또 그의 사역 후반기는 일반적 전도행정 외에 부흥강사를 요청하는 미자립 농어촌교회에 부응하기 위해 1인 전임부흥강사 외 능력 있는 젊은 목사들 10명을 위촉하여 전련에서 교통비만 지급하여 부흥회를 자비량으로 실시했다. 그래서 1인 전임부흥사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부흥사를 동시에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필자도 10명 중 한 명으로 선택되어 1년에 2회 씩 3년 동안 농어촌교회로 파송 받아 활동한 경험이 있다.

그는 또한 전국의 중소도시에 년 1회씩 대복음전도대회를 개최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충북 제천, 경기 광주, 경기 성남, 전남 광주 등 해당 지역 남전도회 지련이 주최하고, 전련에서 강사와 임원들이 협력 동참하여 새 신자들은 물론 기존 신자들은 새로운 은혜를 받아 교회발전과 교단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는 열심 있는 성도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처럼 그가 시무하던 기간은 남전도회를 통해 교단의 전도활동이 전폭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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