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회 주관 목사와 본부 이사가 되어

곽재근 목사는 1928년 3월 13일부터 열린 제5회 연회에서 교단기관지 활천의 기자로 임명되어 1935년 5월까지 약 8년 동안 일했다. 그는 다달이 발간되는 교단기관지인 활천에 설교와 논단, 때로는 지방교회순회기를 써서 전국교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곽 목사는 기자가 되던 1928년 11월호부터 22편의 설교를 통해 뛰어난 설교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곽 목사는 1934년 6월 27일 저녁 서울YMCA 강당에서 열린 ‘성서신앙대강연회’에서 ‘성서적 신앙의 공효(功效)’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회는 조선성결교회가 처음으로 기획하고 실행한 것인데, 매일 밤 모여들어 경청하는 700여명의 청중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곽 목사는 1928년 제5회 연회에서 서대문전도관을 세워 매일 저녁이면 이 일대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정했다. 곽 목사는 번잡한 서대문네거리에서 전도하게 된 것을 감사하여 헌당예배가 있던 그날부터 성서학원의 학생들과 각 교회에서 자원하여 참여하는 전도대원들과 협력, 매일 저녁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했다.

4개월 동안 활동한 결과 믿기로 결심한 사람의 수가 무려 719명이나 되었다. 곽 목사는 1930년 제2회 연회에서 ‘성별회’ 운영 전담목사로 임명됐다. 조선성결교회는 창립 초부터 주일날 오후 시내교회가 연합하여 ‘성별회’를 드렸는데 이를 효율적으로 하는 업무를 맡았다. 한 몸에 삼중 사중의 직분을 맡게 된 곽 목사는 특유의 정열로 맡은 직분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모든 일에 열심히 헌신했다.

곽 목사를 만능인으로 알았던지, 1929년 2월 열린 제1회 연회에서 그는 조선성결교회 본부의 최고 의결기관인 이사회 이사가 되었다. 이사회는 조선성결교회를 치리하는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최고정치기관으로 곽 목사는 본부의 중앙사무국의 ‘경리사’의 직분까지 맡았다.

성서학원의 교수직을 맡으면서 전국 교회의 남녀교역자 수백 명의 인건비와 건축물의 유지보수, 수리. 그리고 전국 교회의 헌금수납을 맡은 중앙사무국의 ‘경리사’ 일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곽 목사는 3년 동안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감당해 내었다.

또한 곽 목사는 1931년 제3회 연회에서 전국교회를 순회하는 ‘순회이사’로 선정되어 여름과 겨울방학 동안에는 전국의 각 교회를 순회해야 했다. 1931년 여름방학인 8월 한 달 동안 서부지방회(평안도)와 함남, 함북지방회 관내의 교회들을 순회하고, 1932년 8월 27일부터 11월 말까지 만 3개월 동안은 강원도지방과 일본 각지에 흩어져있는 조선인 성결교회를 순회하고 돌아왔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고 일제경찰의 감시 속에 여행은 쉽지 않았다. 몸이 피곤한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가난에 허덕이는 현지교역자들의 사정을 들어주지 못하고 다만 위로만 하고 돌아서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어느 교회를 찾아가도 4~5일 부흥집회를 갖게 되었고 그 부흥집회는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는 큰 은혜받는 것을 볼 때 한 사람의 몸이 지치고 넘어져 죽는다 할지라도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곽 목사에게는 더 큰 짐이 지워졌다. 조선성결교회도 교세가 확장되고 교인의 신앙적 수준도 높아지면서 교역자와 신도 대표들로 운영되는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총회가 1933년 4월 12일에 소집되었고 곽 목사는 이 총회에서 투표로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회장은 OMS 미국본부에서 지명하므로 대의원들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은 부회장과, 정·부서기와 정·부회계, 각부 위원들에 대해서만 한정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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