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체험과 일본 유학

큰아버지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철저했다. 술이나 담배를 끊은 후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와서는 가족들을 깨워 가정예배를 드렸고 틈틈이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러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된 큰아버지는 겨울마다 한 달 간 개최하는 노회의 성경학교에 다녀 은혜와 말씀으로 무장하였으며 농촌에 다니며 전도를 하다 마침내 장로가 되었다. 이런 큰아버지의 경건한 생활이 어린 경찬의 생활에 배어들어 큰 영향을 주었다.

경찬이는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며 1924년 보통학교 졸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주일학교 반사와 성가대원으로 임명되어 봉사했다. 그는 평양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약해 평생 농사를 짓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5년제 중등과정인 농업학교 3학년에서 중퇴하였다. 하지만 앞으로 일이 막막했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곧 평양의성 사립학교에 임시 교사가 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19세(1927년) 때 겨울에 평양에서 교파연합성회가 열렸다. 황경찬은 신자들과 함께 연합성회에 열심히 참석했는데, 이때 강사가 김상준 목사였다. 김상준 목사는 1907년 정빈과 함께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귀국해서 종로에 최초의 성결교회인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어 1917년 복음전도관을 떠나 장로교와 감리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명성을 떨치던 중이었다.

황경찬은 성회 첫 시간부터 큰 은혜를 받았다. 열정적으로 외치는 “회개하고 중생하라!”는 강사의 설교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철저하게 회개하였으며 중생을 체험하자 그렇게 마음이 기쁘고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장로교회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중생의 설교였다. “분명히 성경에 많이 있는 말씀인데, 왜 장로교회에서는 그런 설교를 못할까?”라는 의문을 품은 그는 성결교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는 21세(1929년) 때 이웃 장로교회의 김인즙 장로의 딸 김은영 양과 중매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그는 신혼의 단꿈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향학열이 불타올랐다. 처자식을 거느리는 가장으로 책임과 함께 많이 배워야만 좋은 직업과 안정된 가정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문제로 열심히 기도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디를 가도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래서 아내의 양해를 얻은 후에 은밀히 일본 유학준비를 했다.

이듬해 그는 같은 교회의 친구 최헌과 함께 간신히 마련한 여비로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동경에 온 그는 신문배달 등 고학으로 야간 영어학교를 다니다가 1년 만에 삼축대학의 예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한인교회 대정정성결교회에 등록하고 다녔다. 그때 담임은 강송수 목사였는데, 강 목사 또한 회개를 강조하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에 대한 설교를 자주했다. 황경찬은 회개하고 중생했지만, 성결의 은혜는 받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는 어느 수요일 저녁예배가 늦어 이웃교회인 일본인교회에 들어가 뒷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일본인 목사는 설교를 조용하게 했지만 신자들은 은혜를 사모했다. 설교 후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우리 일본나라가 조선 식민지에서 농산물을 빼앗아오는 일은 예수의 말씀에 어긋나므로 일본국이 회개하도록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그 말에 신자들이 함께 기도했다. 그는 놀랐다. 그에게 일본은 조선의 원수고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진실한 일본인들을 보자, 자기 잘못을 깨닫고 밖으로 나와 바닷가에 가서 소리치고 눈물로 회개기도를 했다. 그러자 마음에 평화가 오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성결의 은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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