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헌신적인 목회생활

이태석은 이 씨 가문에 첫 기독교신앙을 전수한 어머니 김효신에게 감화를 받아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서 신학수업을 했다. 김효신은 이태석의 아버지 이인백과 결혼하여 평양시 서성리 보통문 근처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김효신이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유교를 숭상해오던 이 씨 가문의 첫 기독교인이 되었다.

김효신은 신앙생활을 시작부터 철저하게 했고 유교를 숭상하는 집안 웃어른들과 남편의 극렬한 박해를 받았다. 남편은 김효신이 교회로 걸어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다리를 묶어놓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때려서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김효신은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 집을 나온 김효신은 미국인 선교사의 집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성경공부와 신학입문교육을 받았다. 그 후 이태석의 부친 이인백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김효신이 가정으로 돌아왔다.

김효신은 평양 신암교회의 권사가 되어 교회를 섬겼다. 그녀는 몸집이 작지만 매사 적극적이고 야무지게 처리하여 ‘차돌’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녀는 차돌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신앙생활 또한 적극적이고 교회에 대한 봉사와 가정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유달리 뛰어났다. 이태석은 어머니의 그러한 신앙을 물려받아 소명을 깨닫고 열정적으로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이태석 전도사는 1931년 신학교 졸업반 때에 충남 금산교회 개척으로 목회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금산교회가 설립 된 것은 전라북도 청년사회주의자로 한 때 전주고등보통학교를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김재환(金在煥) 청년이 동래에서 구원을 얻은 후 그의 고향인 금산에 교회를 설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성서학원 재학생 김병채와 강경교회 전도부인 정훈이 자기 고향인 금산에 순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어 합심기도한 후 1931년 9월 20일 대전교회의 김응조 감리목사와 김창근 전도사, 권보옥 전도부인을 청하여 4일간 대거전도회를 열었고 결신자 50여명을 얻어 초가 6칸의 셋집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김재환 형제가 교회를 이끌면서 그의 가족이 전부 주께로 돌아오고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었다. 그해 겨울 이태석 전도사가 부임해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회조직을 하게 되었다.(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제4회 연회록 12~13쪽)

김재환 청년은 후에 대전중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고 성우보육원 설립, 기독교세계봉사회 대전지회장, 교단 사회사업유지재단 이사장, 총회본부 총무, 교단부총회장, 전국장로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단을 위해 헌신했다.

금산교회는 창립된지 10개월이 채 안되어 교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장년이 근 100명에 달하고, 주일학생이 100여명씩 모여 아름답게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했다. 그 후 신자들이 열심히 교역자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계속해서 기도했고 경성성서학원르 졸업반인 이태석 전도사를 맞게 되었다.

기도의 응답으로 교역자를 얻은 신자들은 또다시 교회가 비좁아 성전 주시기를 일심으로 기도하는 한편 교회당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금전을 정성껏 모으게 되었고 또 부인회에서는 경종을 사서 달기를 목적하고 일심협력하여 성미와 헌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한지 4개월이 채 안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총회본부가 최석모 목사를 파송하여 시찰한 후 500원을 보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신자들은 가일층 노력하여 주일에 300원을 헌금하였으며 또 건축기성회에서 저축한 금액까지 합해 900원의 돈으로 5월 5일 성전건축공사에 착수했다. 대지 100평을 사서 건평 44평의 큰 예배당 공사를 6월 20일에 마치게 되었다. 부인회에서는 모은 회금 37원으로 큰 종을 사서 25척이나 되는 우뚝한 종각 위에 높이 달고 금산 지역을 향해 울리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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