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식의 성장과 6.25 전쟁

민의식(閔義植)은 1927년 8월 8일(음) 충북 진천군 만승면 월곡리에서 농부 민영근 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근식(根植)이다. 그는 부친을 닮아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또래들 보다 키도 커서 골목대장이었다. 그는 보통학교를 다니다 10살 때 부모를 따라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하여 안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어머니가 전도를 받아 안성성결교회를 다녔고 어머니는 남편도 전도해서 온 가족이 신자가 되었다. 그는 성탄절 행사의 노래나 연극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대중 앞에 서서 발표하는 담력을 키웠다. 또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무슨 일이든지 앞장서서 일하여 아이들의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가 지배하는 시대여서 아무리 뛰어나도 일본인 선생이 반장은 일본인 아이만을 시키는 바람에 반장 한번 못했다.

그가 보통학교를 마치고 안성농업학교에 진학하여 5년의 과정을 마친 그 해 여름, 8.15 광복이 왔다. 청소년 시절에 그는 의협심이 강하여 옳다는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열혈소년이었다. 해방 후, 아직 국가가 조직되지 않고 남한이 미군정을 하던 시절로, 우리 민족은 좌파 우파로 나눠 다투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우리 국민들은 신탁통치에 대해 찬반이 엇갈려 서로 다투고 테러를 감행했다. 그는 항일운동의 영웅 이범석 장군을 좋아해서, 이 장군이 만든 민족청년단 안성지부에 들어가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민족청년단은 우파였다. 우파진영은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대해 찬성하자고 해서, 그도 앞장서서 찬탁여론몰이에 힘썼다. 그런데 며칠 후 좌파진영에서 찬탁을 주장한다며 우파에서 반탁을 주장하게 되자, 그는 정치가 이해되지 않아 여간 혼란스러웠다.

이때 그는 “정치는 사람을 버린다. 정치에 나서지 말고 먹고 살 수 있는 돈벌이에 힘쓰라”는 부친의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민족청년단을 떠나 부기학교에 들어가 공부해서 착실한 상인으로 살려고 했다. 부기학교 2년 과정을 마치고 안성읍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했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잘되었다. 그가 24세가 되던 1950년 1월에 안성장로교회 하 장로의 차녀 정남 양과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착하게 살면 인생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안성 사람들도 피란을 서둘렀다. 특히 소문에 국군, 경찰가족, 공무원이나 심지어 우파 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좌파세력들이 적으로 숙청한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3개월 후 수복되어 돌아와 보니 안성읍의 주요 건물도, 그의 집도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다. 낙심한 그는 집터에 주저앉아 넋이 나갔다. 장차 갑부의 꿈을 키워 온 가게가 날아가자, 그의 꿈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보다 못해 부친이 앞장서서 폐허가 된 집터를 싼 값에 처분하고 다시 충북 진천 고향마을로 돌아가 농토를 구입하고 농사일에 종사했다. 그는 농사일을 하면서도 한적하고 답답한 농사일이 맞지 않아 답답했다.

종일 밭이나 논에서 마지못해 일하는 그에게 하루는 부평에서 처형 내외가 찾아왔다. 조남섭 집사 내외였다. 그가 시골에서 풀이 죽어 농사하는 것을 본 조 집사가 말했다. “공부한 사람이 왜 이렇게 사는가? 부평으로 오게, 일할 곳이 많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 먼저 도시로 가서 자리를 잡은 후, 모시러 오겠다”고 부모를 설득한 후, 부평으로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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