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활동과 최장수 목회자

교수직을 사임한 황경찬은 충격을 받았지만 깊은 기도를 통해 곧 회복한 후, 그의 집 근처에 집을 얻어 ‘노량진성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다시 시작했다. 1961년 교단 총회에서 NCC 탈퇴문제로 보수파들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보수동지회’를 구성한 후, NCC탈퇴를 계속 요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는 1958년 이미 보수적 교역자들의 초교파 모임인 ‘복음주의 동지회’(NAE)의 회장을 역임한 성결교회 보수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교단 분열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는 원칙주의적인 신념이 있었기에 보수파들의 손짓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대신 분열하면서까지 NCC를 고집하면 안된다는 여론을 일으켜, 기성이 임시총회를 열어 NCC탈퇴를 선언케 했다. 그 후 보수파들을 만나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4월에 보수파들이 마침내 ‘예수교성결교회’라는 새 교단을 만들었다. 마침내 성결교회가 분열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의 사명은 두 교단이 합동하도록 주선하는 것에 있음을 알고, 그러기 위해서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될 것 같아 노량진교회의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수시로 양측 교단의 지도자나 임원들을 자기 집으로 각기 초청해서 설득하고, 또 양측 지도자들을 함께 모시고 서로 의견과 조건을 듣고 합동운동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노력하기를 3년 여, 차츰 결실이 나타나 양 교단의 임원회에서 합동위원회가 각기 설치되어 위원들끼리 수시로 만났고, 마침내 1965년 7월 23일 오후 2시 기성은 아현교회에서, 예성은 신촌교회에서 대의원 총회를 갖고 합동을 위한 총회해산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7시에 아현교회에서 양측 대의원들이 함께 모여 역사적인 합동총회(예성 지도자들 중 일부는 합동을 반대하고 이탈했다)를 통해 서로 껴안고 하나가 된 기쁨과 감격을 누렸다. 그는 합동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는 곧 서울체부동교회의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원칙주의적인 원숙한 목회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한국기독교반공연맹의 부회장, 그리고 1974년에 교단의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교단의 발전을 몸소 지휘했다.

1977년에는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회장과 1979년에 교단 해외선교위원회의 초대회장에 취임하면서 ‘세계를 성결의 빛으로’라는 표어 아래 만민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을 착실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체부동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45년 동안 한평생을 기도하고 힘쓰던 교단 일선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신학대학의 요청으로 해박한 성경지식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강사로 10여 년간 봉사했고, 또한 초대회장으로 봉사했던 해외선교위원회의 평생회원에 가입하여 선교사들을 지원하는데 힘을 보태었다.

그는 1990년에 66년 간 동반자였던 김순영 사모가 소천하여 슬픔을 억누른 후 장례식에 들어 온 조위금을 성결교회가 별로 없는 제주도에 한라교회를 개척, 시무했다. 그는 목회를 위해 작은 승용차를 구입하고 운전면허를 딴 후, 운전사상 83세의 최고령 운전자가 탄생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3년 간 한라교회의 기초를 닦은 후 젊은 목회자에게 인계하고, 대전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경건한 생활위주로 보내다 2007년 2월 가족과 친지들만으로 ‘100세 생일잔치‘와 원로목사 30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하고, 대전에 있는 32평 아파트를 체부동교회(영광교회)로 헌납했다. 그는 2008년 1월 17일 101세로 잠을 자듯 조용히 소천하여, 원칙주의의 바른 목회자이며 성결교회 최고령 목사, 최장수 원로목사의 생애를 아름답게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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