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과 목회, 그리고 옥중생활

1935년 그가 대학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일본의 성결교회 순회목사로 온 곽재근 목사를 만나게 된다. 순회목사는 각 교회를 다니며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중생체험이 분명한 청년들을 설득해 교역자로 헌신케 하는 사명도 있었다. 곽재근 목사는 황경찬을 추천했고 그는 서울로 돌아가 성서학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의 학제는 3년 6학기제를 변경하여 1년에 3개월 수업을 한 후, 나머지 9개월은 각 교회에 가서 전도하거나 개척하게 했다. 즉 1년에 3개월의 학습과 9개월의 전도실습이 진행된 것이다. 그 결과 해마다 사명있는 신학생들을 통해 50여 교회나 개척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원칙을 준수하는 그는 항상 학업성적이 우수했고, 기도생활에도 모범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의 몸이 허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척을 하는 무리수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재학 중에 평안도 양시교회, 황해도 황주교회, 평양 진지동교회, 평양 용성교회 등에서 주임목회자를 도와 부교역자로 일했다.

마침내 1936년 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황해도 신천교회 주임교역자로 발령을 받고 목회하였고 근처 문화읍에 성결교회를 지교회로 개척하는데 힘썼다. 그의 목회의 특징은 부흥사라기보다 성경을 바르게 잘 가르치는 교사 스타일이어서, 신자들에게 신앙의 기본을 잘 가르쳐 말씀으로 굳게 서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1942년 평양 암정교회의 주임전도사로 시무 중 나이 34세에 목사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인천교회의 주임목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성결교회 창립자 정빈 전도사가 개척한 인천교회는 인천지역의 어머니교회였다. 그는 서울과 가까운 인천교회의 사명을 깨닫고 교회부흥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 말기로 교회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1941년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日帝)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물자공급과 함께 조선 국민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 중 하나가 기독교에 대한 간섭과 통제로, 일제는 성경을 폐기하고 찬송가를 선정해서 부르게 하도록 교단의 대표지도자 모임을 주선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결교회 이명직 목사가 강하게 반대하자 일제는 성결교회에 대한 약점을 잡기 위해 월간 활천을 철저하게 번역, 조사했다.

그 결과 많은 성서강해와 설교에 ‘재림의 왕 예수’라는 말이 나오자, 1942년 말에 활천을 폐간시켰다. 만왕의 왕 예수가 재림하면 일본의 왕도 심판을 받는다는 교리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1943년 봄에는 경성신학교를 폐교시키고, 이어 5월에 전국의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체포해서 심문했으며. 9월에 성결교회를 폐쇄하고, 마침내 12월 29일부로 교단 해산령을 내렸다. 황경찬 목사 또한 인천경찰서에 체포되어 7개월간 옥중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해산령이 내려진 이튿날 석방되었지만 교회나 신자들이 없어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에서 밭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활하며, 주일에는 가족끼리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리고 간절하게 해방의 조국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다가 조국해방을 맞았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인천으로 가서 교회를 어렵게 재건하고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목회하면서 송림교회, 중앙교회, 북성교회 등을 연달아 개척했다.

어떤 분이 해방 후 영화중학교를 설립했으나 경영이 어렵게 되자 황 목사를 찾아 운영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가 인수하고 이사들을 파송했고, 황 목사가 2년 동안 교장이 되어 인재를 양성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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