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신앙의 출발

황경찬은 1908년 12월 18일(음) 평안남도 안주의 작은 마을 신향리에서 부친 황주형과 모친 문주애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태어나자 모두가 기뻐했고, 어머니는 딸들보다 더 아끼고 사랑을 쏟았다. 어려서부터 이목구비가 준수하고 훤하게 잘생긴 그는 가족은 물론 가문의 희망이었다.

그는 영리하고 탐구심이 강해 보는 것마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불쑥 컸으나 몸이 호리호리하게 말라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밥을 많이 먹도록 했지만 구미가 당기지 않는 듯 항상 음식을 조금만 먹고 수저를 놓아 어머니를 애타게 했다. 이런 식생활 습관이 평생토록 계속되어 그가 100세를 향수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1914년, 6살이 된 그는 가족과 함께 작은 시골마을을 떠나 번화한 도시 평양으로 이사했다. 이는 평양역전에서 철도화물운송 사업을 하던 큰 아버지가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당분간 큰 아버지 집에서 함께 생활해서 집안이 항상 북적였지만, 황경찬은 이북 최고의 도시 평양의 문물을 보고 느끼면서 성장하는 것이 좋았다.

1905년 일제가 서둘러 개통한 경의선이 압록강을 지나 만주까지 철도가 뻗어있어서 평양은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했고, 경의선의 중심지인 평양역은 화물이 많아 이를 운송하는 화물사업은 나날이 번성했다. 화물운송사업이 잘되자 곧 경쟁자가 나타나 그의 가족의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착실하게 빈틈없이 처리하는 그의 부친과 형에 비해 난데없이 나타난 요령 많은 경쟁자는 바로 옆집에 사무실을 열고, 밤마다 일본인 역장을 요정에 모시고 대접하고 또 아부하고 뇌물을 주며 철도화물을 더 많이 확보해 갔다. 착실함과 신용 하나로 버티던 큰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화물이 없어 위기에 봉착하여 거의 망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그의 부친이 병이 들어 3년 간 투병을 하다 29세 청년의 몸으로 별세했다. 그는 부친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오직 ‘배워야 산다’는 것을 깨닫고, 큰 아버지를 설득해 그동안 4년 동안 다니던 한문서당을 접고, 10세때 평양약송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교회에 가게 된 것은 큰 아버지의 덕분이었다. 사업을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자를 감당할 수 없던 큰 아버지는 사업이 망하게 되자, 얼마동안 실의에 빠졌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 앞을 지날 때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소리에 마음이 끌렸다. 그 힘찬 찬송소리가 자기를 오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는 교회가 무엇을 믿는지 몰랐지만 불교와 다르게 신자들이 능동적이고 활기가 찬 것을 알고 관심이 갔다. 그러다 어느 주일에 그는 큰 결심을 하고, 집 근처에 있는 연화동장로교회에 자진 출석했다가 신자들이 함께 부르는 찬송가에서부터 큰 은혜를 받았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성도들의 열심 있는 찬송에 큰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먼 고향을 찾아 온 듯 마음에 평안이 오자, 손들고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다음 주일부터 온 가족들이 교회에 가서 등록하여 신자가 될 때 황경찬도 처음으로 교회 주일학교에 등록하여 찬송과 설교말씀을 듣는 주일학생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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