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교회 개척과 함남지방회 창설, 성서학원 교수로

조선성결교회는 1922년 4월 제2회 교역자 간담회에서 국내외에 순복음을 전하자는 목적으로 전도국을 조직했다. 경성성서학원에서 수학하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의 학생 2~3명이 함경도에 교회 개척을 요청했고, 동양선교회 본부는 1926년 4월 곽재근 전도사를 개척자로 파송했다.

곽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는 북청출신 이정원 부임전도사와 신광빈 전도부인과 함경남도 북청으로 내려갔다. 북청에 도착한 후 전도계획을 짜고 사립 북청극명학교의 교실 한 칸을 예배처소로 빌려 대거전도회를 열었다. 3명의 전도사는 5월 22일부터 1주일 동안 밤에는 길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고 낮에는 인근마을 장터를 찾아 시장전도를 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결신자 90명을 얻었고 6월 12일에 창립예배를 드리니 새 구도자 20여명이 참석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이들은 신자와 타락했다가 다시 돌아온 신자들로 ‘전도대’를 조직, 북청읍 사방 30리 이내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해, 1년이 못 되어서 200여명의 신자가 모이는 교회로 발전시켰다. 당시 북청은 군내 장로교회만 해도 7~8개가 있었다. 이들 교회 교인들은 새로 들어온 성결교회의 뜨거운 전도방법에 감동받고 곽 전도사의 겸손한 태도와 성경말씀을 그대로를 전하는 설교말씀에 은혜를 받아 교회를 옮기기도 했다.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부가 교인들을 빼앗아 갔다는 이유로 동양선교회에 항의하는 일까지 있었다.

개척 1년 만에 북청교회가 크게 부흥되자 예배처소가 비좁아졌고 교회는 홍원, 어포리, 예원리, 평산, 니망지리 등의 인근 마을에 지교회를 세워 교인을 분산시켰고 예배당건축을 위해 기도했다. 이 소문이 동양선교회의 기관지를 통해 미국과 영국에 알려졌고 미국 성도들은 북청지방 유지재단을 조직, 헌금하여 북청교회는 1923년 7월 24일 새 예배당 건축에 착수하여 그해 10월 헌당식을 올렸다.

개척 1년 만에 지교회가 5곳이나 생기고 북청교회가 부흥한 것은 부임전도사와 신 전도부인이 곽 주임전도사에게 절대적으로 협조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교단본부는 북청지역의 6개 교회를 중심으로 지방회를 창설하기로 하고, 곽 전도사를 1923년 3월 전국남녀교역자수양회 기간에 목사로 장립시키면서 함남지방회를 창립하고 대리감리목사로 임명했다. 함남지방회는 감리사 곽재근 목사의 흘린 땀으로 해마다 교세가 늘어났고, 북청 인근 지역에서부터 함경남북도 전역에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곽재근 목사의 북청교회에서의 만 5년(1922~1926) 목회는 일생에 가장 보람찬 목회생활이었다. 곽 목사는 북청교회의 시작으로 ‘관북지방’, 그것도 캐나다장로교회의 전담 선교구역에서 짧은 기간에 40여 개의 성결교회가 설립 되도록 공헌, 전국 성결교회와 조선의 교계에 널리 알려졌다.

1926년 3월 그는 본부이사회로부터 경성성서학원의 교수로 발탁되고, 동시에 학생감을 맡았다. 곽 목사는 성경강해에도 능해 1928년 활천 3월호부터 1935년 5월호까지에 ‘히브리서 강해’를 29회에 걸쳐 실었다. 이 히브리서 강해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쓴 일종의 연구논문이다.

곽 목사는 설교도 참신했다. 설교의 내용이 매우 조직적이고 제목과 대지도 간결하고 명확해 청중들에게 호소력이 있어 신학생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곽 목사가 하는 설교의 밑바탕이 된 신앙적 경험은 순안 의명학교와 10여 년 동안 개척교회 목회에서 얻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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