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 의명학교 진학 후 경성성서학원 입학

곽재근(郭載根)은 1893년 7월 9일(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부친 곽유익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인근에 이름난 한학자였고 부친 역시 한학자인 선비로 알려져 있다. 재근은 선비집안의 자손답게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다. 4살 때 한문을 깨우치고 7살의 어린나이에 사서삼경까지 통달, 운자를 대면 한시(漢詩)도 척척 지어서 신동으로 불리었다.

15살이 되자 당시 일찍 결혼하는 풍습에 따라 같은 면의 백동진 씨의 셋째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께서, “재근아, 너 순안으로 가서 공부하여라”라고 말씀하셔서 이에 순종했고 재근은 혼자 순안으로 가서 의명중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재근을 순안으로 유학을 시키기까지는 이모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독실한 기독교신도였던 이모는 ‘신학문을 가르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가야한다’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재근은 의명학교에서 새로 배우는 과목들이 무척 재미있고 새롭고 신기했다. 의명학교 선생들의 식견과 성경을 바탕으로 한 교육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는 방과 후마다 자유롭게 학생 전도대를 조직하여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를 했는데 재근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다. 이런 재근을 동료나 선배들이 무척 아껴줬고 담임선생과 교장선생도 총애했다.

재근은 방학 때면 으레 고향으로 돌아와 이웃 용강군 귀성면 새추리의 이모 댁으로 가서 지냈다. 새추리에는 매우 큰 감리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모집안은 1906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성결교회 계통의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하고, 1908년에 귀국하여 진남포성결교회를 세운 강태온, 1914년에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서울 아현교회의 주임교역자가 된 강시영, 1914년에 경성성서학원에서 수양중인 강태집 등을 배출한 기독교의 명문가정이다.

재근은 방학 때마다 이모 댁에 가 있게 된 것은 우선 이모 댁이 기독교집안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가 쉽고, 이모 댁의 신앙적인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여름에는 교회에 나가서 어린이성경학교를 돕고, 겨울에는 미처 읽지 못한 종교, 문학, 철학 등의 책들을 따뜻한 방에서 읽었다.

특히 재근의 중학교입학 기념으로 사주신 성경, 찬송가를 받았을 때의 감격을 잊지 않았다. 그 성경의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의 구절에 붉은 줄을 쳐놓고는 성경을 펼칠 때마다 묵상했다. 이 구절은 성경을 받아 펼쳤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와 감동을 준 구절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믿음에도 충실한 재근에게 이모는 서울로 올라가 신학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다.

재근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서 아현교회의 정주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는 이모부의 형인 강시영 전도사를 만나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강 전도사는 “자네는 참 좋은 길을 선택했네. 하지만 이 공부는 마음만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닐세. 기도 많이 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끝내 이루지 못하는 것이 이 공부일세.”

강시영 전도사는 곧 곽재근을 경성성서학원 원장 토마스 목사에게 안내했다. 원장은 곽재근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는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수양을 마쳐야 한다”고 격려하며 입학을 허가했다. 곽재근은 의명중학교에서 배운 성경지식과 은사들이 간곡하게 들려주던 말씀들이 성서학원에서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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