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회 이탈과 하나님의교회 창립

조선성결교회 총회 부회장인 곽재근 목사는 전성기에 이른 조선성결교회의 민선 최고지도자로서, 성결교회 본부와 교회, 교역자 사이의 크고 작은 일들을 믿음과 덕과 사랑으로 성심껏 도와주었고 모든 행동과 말을 조심했다. 그는 모든 일에 원만하고 그르침이 없었기에 제2회 총회(1934)에서도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비록 동양선교회 선교부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선성결교회의 교역자와 교회지도자들은 자율적으로 총회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지역교회들은 교회재정의 자립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자급자립을 선언하는 교회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하여 1932년 총회 창립을 위한 결의에서 1935년 3월 제3회 총회 개최 시까지를 조선성결교회의 전성기라고 일컫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격으로 성결교회의 전성기에 조선성결교회는 시험이 들었다. 1935년 3월 열린 제3회 총회에서 제3대 총회장으로 지방교회의 대의원인 변남성 목사가 당선되었다. 젊은 변남성 목사의 당선은 이변이었다. 변남성 목사는 서선(평안도) 출신으로 서부지방의 순회를 맡아 활동하던 소장파였다.

변남성 목사가 당선되는 데는 중앙대의원 곽재근 목사의 활동이 컸다. 1929년 곽재근 목사가 성결교회의 이사가 되었을 때 이사회는 헤인즈 선교사가 회장이었고 이명직 목사와 최석모 목사가 이사가 되었는데 이 가운데 곽재근 목사만이 서선지방 출신이었다.

성결교회는 한국인에 의한 자치와 자급문제로 지방과 중앙세력 간에 불만이 생겼으므로 곽재근 목사는 지방목사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총회장은 지방출신을 세우고자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그 결과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변 목사는 평남 용강 사람이며 곽 목사와 동향인이었다.

그러자 일부인사들과 원로들에 의해 “아직 변남성 목사는 나이가 어리고 우리 편에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점을 이유로 제3회 총회를 무효화시키고 총회 대신에 이사회를 집권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사회는 ‘선교사 반대파’니 ‘불순종파’니 하는 구실로 변남성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시켰고 곽재근 목사를 6개월 정직처분을 하는 한편 서재철, 송태용, 김광원 전도사 등을 면직처분했다. 지방출신 교역자들은 어떤 뚜렷한 법적 근거도 없이 지방출신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로 총회를 무효로 규정한 것은 큰 비법이며 반민주 처사라고 규탄했다.

전국에 뜻 있는 60여명의 교역자들은 근신처분이 내려진 곽재근 목사와 면직된 교역자들의 구명운동을 전개했지만 그 뜻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곽 목사는 모든 도의적 책임을 지고 1936년 7월 13일부로 사직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목포교회의 신자들은 곽재근 목사를 모셔다가 일본인 집 한 채를 빌려 새롭게 교회를 시작했다.

이후 1936년 9월 12~14일에 평양상수리 교회에서 서선지방 교회와 호남지방 교회 가운데 자립 자급하는 10개 교회가 모여 ‘하나님의교회 창립’을 선언했다. 하나님의 교단은 미국 성결운동의 일파로서 워너(D. S Waner)에 의해 최초로 창립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성결교회의 첫 번째 분열사건이다. 곽 목사는 동양선교회(OMS)의 처사와 중앙간부들의 맹종에 불만을 품고 성결교회를 떠났다. “총회 해산을 어떻게 선교부가 선언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좋다. 총회를 해산시켰으면 다시 새 총회를 만들어 조선인에 의해 집권시켜야지 왜 동양선교회 이사회가 집권기관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결국 20여 년 동안의 공적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교회로 떠났다. 그 후 목포 하나님의교회를 설립하여 일하다가 1963년 정년퇴임하여 1970년 2월 1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니 향년 78세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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