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과 금산교회의 특별한 예배

가족과 성도들이 이태석 목사의 행방을 찾기 위해 평양 시내 곳곳을 찾아 헤맸다. 경찰서와 관공서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가족들은 공산군이 퇴각하면서 목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넣고 사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송희 사모는 정신없이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묻혀있다는 곳마다 찾아다녔다. 다음 날 10월 21일, 50여구의 시체가 뒤엉켜 매몰되어 있는 동평양 철도역 근처 평천리 야구장 한 모퉁이 방공호 속에서 사살된 이태석 목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목사는 가슴과 어깨에 총탄을 맞고 몸은 쇠줄로 묶인 채 운동장에 눕혀져 있었다. 납치인사들을 한데 몰아넣고 이들을 살해한 것이다.그의 얼굴은 아주까리 이파리로 덮여있었다. 온가족과 성도들이 이태석 목사의 싸늘한 시신을 붙잡고 얼마간을 모르게 울었다. 이태석 목사는 50세의 젊은 나이로 공산당의 총탄을 맞고 순교한 것이다.

이 비극적인 시체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이태석 목사는 공산당의 회유를 물리치고 생명의 위협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복음의 사역을 다했다.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했다. “공산당은 망한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공산당원을 향해 외쳤다고 한다(한국기독공보 1984년 7월 21일 제1515호).

순교자 이태석 목사의 장례예식은 10월 23일에 평양 서문 밖에서 교회 성도들과 친척, 가족들의 애도와 찬송 가운데 거행했다. 그리고 이태석 목사가 즐겨 부르던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낙원 있네/ 믿는 이만 그 곳으로 가겠네/ 저 황금 문 들어가서 주님 함께 살리로다/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저 울리는 종소리와 천사들의 노랫소리/ 영광일세 할렐루야 기쁘다/ 빛나는 저 강 건너편/ 아름답고 영원한 곳/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라는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열린 사랑, 2007년 6월호, 독립애국청년 순교목사, 이태석 목사, p34). 그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순교자였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중공군들이 평양 가까이 내려왔다는 소식과 함께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김송희 사모는 두 아들 승만과 승규에게 잠시 동안만 집을 떠나 피난을 갔다가 난리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강권했다.

대동강만 건너가서 이삼일 지나고 다시 돌아오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1950년 12월 3일 주일 아침, 두 아들을 떠나게 했다. 네 명의 딸들은 너무 어려서 같이 보내지 못했다. 당시 큰 딸 경신은 14살, 둘째 딸 경옥은 10살, 셋째 딸 경주는 8살, 넷째 딸 경복은 생후 6개월의 아기였다.

김송희 사모는 두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제 이렇게 떠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또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니 우리가 서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기도 가운데서 서로 만나자(‘화해꾼 이승만 목사’, 박용진 지음, 49쪽)” 이렇게 두 아들을 떠나 보낸 김송희 사모는 이 땅에서 두 아들을 영영 보지 못했다.

2008년 11월 9일 금산교회에서는 금산교회 초대교역자로 사역했던 순교자 이태석 목사의 두 아들이 교회를 찾아 함께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에서는 셋째 아들 이승규 장로가 특별찬송을 불렀으며, 차남 이승만 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어릴 적에 보고 들은 초기 금산교회 이야기와 이태석 목사의 목회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산교회 성도들은 이 특별한 예배를 통해 순교자 이태석 목사가 사역했던 교회라는 자긍심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금산교회 담임 김영문 목사는 “아버지의 사역을 기억하며 미국에서까지 찾아오셔서 감사하며 교회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배 후에는 교회가 이 목사 형제에게 금산특산물인 인삼과 홍삼액을 선물했으며, 이 목사 형제는 모든 성도들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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