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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진달래 뜰에는 장미꽃/ 다시 찾은 봄 동산에 꽃이 피누나./어려움 참아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보람찬 내일을 이룩해 보세/믿음과 소망의 푯대를 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 성세 재활원//찬란한 아침 해 동산에 솟을 때/ 한줄기 푸른 꿈이 힘차게 자란다./어두움 헤쳐 가는 빛나는 샛별같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세/믿음과 소망의 푯대를 들은 / 우리들의 보금자리 성세 재활학교//위의 가사는 성세재활원의 원가다. 1965년 9월 30일, 당시 개업하고 있던 조치원 병원에서 재활원이 있는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남시균 장로가 영감을 얻어 지은 것이다. 이 노랫말은 그의 사명이고 삶이었다. 성세재활원 1965년 초, 일본의 장애복지법인인 벳부의 ‘태양의 집’(나가무라 박사)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10.1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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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77년에 장애자를 위한 적극적인 집념으로 대전시를 장애자 모델의 도시로 만들기로 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대전 시내 곳곳을 다닐 수 있도록 80곳의 보도턱을 없애는 공사를 대전시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노력이 실제적으로 결실을 맺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이동하지 못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시내 중심지로부터 외곽에 이르기 까지 보도턱을 낮추는 공사가 이루어졌다.또 그는 장애자용 공중전화 박스도 가설하도록 대전시에 촉구하여 대전 시내 곳곳에 장애자용 공중전화가 설치되었다. 이런 그의 장애인운동으로 이루어진 내용을 경향신문(1977년 9월 22일자)이 “횡단보도 휠체어 보도턱/대전시 지체부자유자들에게 감격의 선물/장애인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있어/84곳에 84만원 작은 비용”이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9.2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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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전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며 성세의원을 운영하던 남시균 장로는 모여드는 소아마비 환자들을 많이 진찰하고 치료하게 되었다. 날마다 병원을 찾아오는 그들을 대하면서 남시균은 마음에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때 그의 눈에 띤 것이 있었다.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는 커녕 사회에서 극히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장애인들의 실상이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의 소명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불우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펴주는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얼마나 장애자들을 보살피고 치료해 주셨던가.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자신의 생애를 이들 장애인들의 재활하여 그들을 사회에 복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962년 초가을에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장애아동 7명을 데리고 숙식을 함께하며 돌보기 시작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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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9.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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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되려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의학전문학교는 입학시험도 어렵지만 몇 년 동안 학비가 만만치 않음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의사면허시험제도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독학으로 공부해서 면허를 따기도 했다. 그는 독학으로 의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다. 그는 어렵다는 의학 서적을 주문하고 독학으로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의사가 되는 것을 꿈꾸며 난해한 의학용어를 익혔다.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과 술어를 알기 위해서 때론 전에 입원한 병원 의사를 찾아가서 묻고 배웠다. 이듬해 조국이 해방되었다. 광복이 되었으나 민족은 질서를 찾지 못하고 좌우파가 대립되어 아주 혼란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의학 서적을 읽고 수술 과정을 노트에 그려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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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9.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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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시균은 1924년 6월 14일(음력 5월 14일) 충남 대전의 남쪽 보문산 밑의 한적골(대사동) 16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성 남씨 희증 씨이고, 어머니는 김호준 씨인데, 아들이 다섯이며 딸이 둘인 7남매 가정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어린 유아기에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하게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학자로 마을에 보문의숙이라는 서당을 세워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매우 영리한 것을 안 할아버지는 그를 서당에 가게 하여 한문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그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6살에 천자문을 띄고, 7살에 아버지의 모교인 대전제일보통학교(초등과정)에 입학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곧 대전공업전수학교(중고등과정) 토목과에 진학하여 3년간 공부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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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
2012.09.0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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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통재라! 李목사의 별세함이여, 세월이 물과 같고 인생은 꿈과 같다더니 李형의 별세를 가르침인가? 이 영전(靈戰)에서 지사충성하여 최후일각까지 싸우다가 순직하였으니 십자가 군병의 떳떳한 일이요. 함께 군사가 된 동료의 자랑이로다! 아, 쓸쓸한 세상에서 그대의 행복된 죽음이여! 순교자의 반열에 참여됨이로다.… 나는 이제 목자를 잃은 군위교회의 어린양 무리와 남편을 잃은 부인과 아버지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무엇으로 위로하리. 눈물이 앞을 가려 목이 메여 말을 못하겠노라. 오, 주님. 당신의 종의 유족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李형이여, 나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면 반가이 만나리라.”(경주교회 이성영 목사) 위의 두 편의 애도사가 전국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어 전국 교회적으로 유족모금이 일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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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2.08.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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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당시 군위교회의 예배당은 건물이 좁고 많이 낡아 새롭게 신축을 해야 했다. 군위교회는 1927년 강태집 전도사 시절에 예배당 20평과 사택 10평으로 건축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 만에 신자는 전보다 많아졌으나 교회당은 심히 낡아 한쪽 모퉁이가 기울어지면서 신축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농촌인 군위교회 신자들의 헌금만으로는 건축이 어려워 이종익 목사는 전국교회의 모금과 함께 일본성결교회까지 찾아가 모금활동을 펼쳤다.모금을 위해 몇 개월 동안 강단을 비울 수밖에 없어 이종익 목사는 그를 대신해 군위교회 출신 시각장애인 김영수 전도사에게 설교를 하도록 했다. 이 목사는 건축모금 활동을 하기 위해 수건(타올)을 만들어 국내외로 다니며 팔면서 모금을 하였고, 일본 동경에서는 자동차 교통사고를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8.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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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이종익은 매 학기 말에 학교가 주최하는 성결집회에서 성결체험을 했다. 그래서 그는 성결교회가 가장 훌륭한 교회임을 자부하면서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성결한 교역자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는 성서학원 생활에서 기도와 성경연구 그리고 저녁마다 동료들과 함께 자진해서 큰 거리에 나가 북을 치고 찬송하며 노방전도의 경험을 쌓았다. 교역자가 되면 노방전도를 해서 새 신자들을 모으고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1930년에 5월에 성서학원을 졸업과 동시에 동료의 소개로 만난 정숙한 조옥하 양과 학교 강당에서 신학생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드렸다. 그리고 총회에서 경북 군위에 있는 의흥교회의 주임전도사로 임명 받아 아내와 함께 부임하여 성서학원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8.1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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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익은 홍원군에 하나 밖에 없는 장로교회를 찾아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몇 년 동안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목사의 설교가 탐탁치 않았다. 간도의 명동교회처럼 신앙과 애국적인 면에서 마음에 울림과 결심을 주는 설교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주일예배를 마친 오후였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길에서 북을 치고 노래하며 전도하는 노방전도대를 만났다. 전에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노방전도대를 둘러서서 구경을 했다. 전도대원 몇 사람들이 마음을 합해 힘을 다해 찬송을 불렀고 조금 지나자, 어떤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열렬하게 설교했다.“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저 동평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8.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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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숭고한 뜻을 위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4가지의 종류로 나눠 순국자(殉國者), 순교자(殉敎者), 순직자(殉職者), 또는 순절자(殉節者)라고 부르고, 그를 기리며 존경한다. 그런데 그 중 순직자란 정확히 어떤 죽음을 의미하는가? 국어사전에 보면, 순직자란 ‘자기가 맡은 직무를 수행하다가 사고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말한다고 했다.온 천하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자기가 맡은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다 어떤 사고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는다면 이는 분명 큰 희생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 성역에 성실하게 종사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말미암아 소천했다면 그야 말로 순교에 가까운 순직자라고 할 것이다. 1937년에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 구 성전을 헐려고 천정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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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7.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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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하나님께 서원했다. ‘그렇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던 전쟁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다. 덤으로 사는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자!’ 마음을 결정 하고 나니 기쁨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이 겪은 체험들이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는 1953년 4월 29일 포로들의 희망에 따라 광주수용소에서 부평 제10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가족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서울이 가까운 부평수용소를 택했다. 부평을 택한 포로들 대부분이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대한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그해 초여름이 되자 휴전회담이 재개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북측의 주장에 따라 강제송환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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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7.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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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 업!”이라는 소리에 의식을 찾은 전용규는 깜짝 놀랐다. 양쪽 팔이 미군 병사의 육중한 전투화 밑에 깔린 채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 백인 병사는 총구를 바짝 들이대며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다. 미군들은 그의 모자를 벗긴 후 빡빡 깎은 머리를 보고 한국군 군복을 입은 위장한 인민군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그는 손짓 발짓으로 인민군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결국 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미군에 이끌려 도로변에 나오자 국군이 보였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국군에게 다가가 자신은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주먹과 욕설뿐이었다. 군번도 없고 까까머리에 카빈총, 인민군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미군 지프에 실려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등판에 큼직하게 ‘POW’(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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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7.1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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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새벽 4시! 고막을 찢을 듯이 요란한 포성과 함께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6.25전쟁의 한 가운데서 인민군으로 임진강 상류 구화리(九化里) 전선에 투입된 것이다. 부대는 38선을 넘어 사흘을 밀고 내려와 곧장 서울로 진격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주둔했다. 고향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는 형무소 뒤에 있는 외삼촌 집을 기억하고 위생병 가방을 지고 슬그머니 부대를 빠져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뵈올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그 기대는 한낱 꿈에 불과했다. 인민군 경비병의 검문을 받아 다시 붙잡힌 그는 즉결총살 감이었으나 어느 장로의 아들인 인민군 장교의 보증으로 가까스로 총살은 면하고 서대문형무소 16호 감방에 갇혔다.지겹도록 해왔던 수용소 생활이라, 더욱이 전시 중에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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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2.07.0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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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규는 천진에서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선봉소대로 배속 받아 행군의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창센으로 이동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두 번째로 포로가 되었다. 학습과 고문, 지겨운 포로 생활에 시달린 그는 탈출하고자 작심했다. 어느 날 중공군들이 대승을 자축하여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틈을 타 그는 탈출을 했다. 기쁨도 잠시, 숨어든 시골집 주인의 밀고로 다시 붙잡혔고 탈출에 실패한 그에게 더욱 잔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물이 절반가량 찬 흙구덩이에 들어가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있어야했다.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강렬한 집착으로 그는 중공군에 지원했다. 1949년 그는 병원 조수 경력으로 인해 의무병이 되었다. 그는 묘책을 세웠다. 하루 종일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있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6.2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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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규 목사의 생애는 기막힌 파노라마다. 중국군, 중공군, 인민군, 한국군의 군복을 갈아입으며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어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빈민굴교회, 한강백사장난민의 어진 목자. 나환자자녀 후원자 결연, 홀트양자회 복음사역, 600여회의 간증과 부흥집회 등…. 복음사역에 자신을 불사른 순명의 목회자였다.전영규 목사는 1932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은행 간부인 부친 전장석 씨의 4대 독자로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1944년 12살 때 만주 조폐공사로 전근한 부친을 따라 만주 신경(新京)으로 이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버지가 일본의 관공서에서 근무했다 하여 친일파로 지목되어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은 덕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2.06.2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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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교회에 부임한 김동훈 전도사는 평소의 목회 습관대로 주일과 수요일 밤 예배 후에는 반드시 강대상에 엎드려 자정까지 심야기도를 했다. 자신의 온전한 성결과 신자 가정의 평화와 교회의 부흥, 그리고 나라 없는 슬픔에 목메어 조국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그가 부임한지 6개월이 지난 1928년 9월 27일 수요일 저녁이었다. 기도회를 마친 그는 교회에서 심야기도를 하려다 문득 아내의 조카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새벽에 서울 친정으로 간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나 그를 챙겨주고 와서 기도하려고 자기 집으로 갔다. 아내는 친정나들이에 필요한 엽서 한 장, 옷 염색할 염료, 친정 아이에게 줄 과자를 사서 기도 마치고 올 때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그는 여러 가게에 들러 부탁한 물품을 사서 들고 골목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2.05.25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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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이 3년 간 성서학원에 있으면서 체험한 가장 큰 깨달음은 성결의 은혜였다. 중생만 하면 다 된 줄로 알았는데 더 높은 경지, 성결의 은혜가 있었다. 또한 교역자의 자질은 바로 성결이었고 이것이 평신도와의 구별이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받기 위해 학기 중간 외국에서 온 특별 강사들이 외치는 성결집회에 참석해 금식하면서 매달렸다. 그 결과 그는 2학년 봄에 성결의 은혜를 체험했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바라며 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평소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한 몸이 아니었으나 특별한 병은 없었다. 더구나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수요일 밤과 금요일 밤에는 금식하면서 철야했다. 또 자기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이를 계속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그래서 영력은 충만했으나 몸이 허약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5.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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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중 새벽과 낮, 그리고 밤 부흥회에 계속 참석한 김동훈은 강사로부터 처음으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중생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놀랐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그런 설교를 듣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 말씀이 성경(요 3장)에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여러분, 회개하시오. 철저히 회개하지 않고 중생하지 않으면 천국가지 못합니다. 회개 하시오!” 강사 목사님이 계속 외치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별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흥회 사흘 째 날 새벽기도회 중에 갑자기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가 하나 둘 생각나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울면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물로 하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2.05.0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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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동준 씨는 자기도 모르게 동훈이가 즐겨 부르던 ‘날 사랑하심’이란 찬송을 소리 내어 읊조리다 놀랐다. “날 사랑하신다는 말이 성경에 써 있다고? 그렇다면 성경이란 책을 한번 읽어보자.” 그는 또 동훈이가 즐겨 외우던 성경구절을 소리 내어 외워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 중에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준다는 말이 마음에 끌렸다.동준 씨는 체면이 있어 자기가 나서지 못하고 어린 동훈에게 교회에서 성경을 구해오라고 부탁했다. 주일에 교회에 간 동훈이가 작은 성경 하나를 가져왔다. ‘요한복음’이라고 표지에 쓴 쪽 복음 성경이었다. 한글과 한문이 섞인 글이어서 읽기가 아주 편했다.동준 씨가 첫 장을 펼쳤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2.04.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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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정치보위부로 소환된 9월 27일 아침이 되자 이기웅 목사는 사모에게 “우리는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그 날을 대비해야 하오. 깨끗한 옷 한 벌만 준비해 주시오. 내가 평소에 강단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교하던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을 뵙고 싶소”라고 말을 했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정치보위부를 향해 갔다.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정치보위부원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기에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간 것이다.그가 수수밭 길을 지나는데 밭 속에서 갑자기 두 청년이 뛰어나오며 말했다. “전도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정치보위부에 갑니다.”, “지금 위험한데 거기에는 왜 가십니까? 우리와 같이 여기에 숨으십시다.” 이웃 청년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때 그는
일화이야기
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2.04.04 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