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어

“스탠드 업!”이라는 소리에 의식을 찾은 전용규는 깜짝 놀랐다. 양쪽 팔이 미군 병사의 육중한 전투화 밑에 깔린 채 누워있었던 것이다. 그 백인 병사는 총구를 바짝 들이대며 일어나라고 손짓을 했다. 미군들은 그의 모자를 벗긴 후 빡빡 깎은 머리를 보고 한국군 군복을 입은 위장한 인민군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그는 손짓 발짓으로 인민군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결국 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미군에 이끌려 도로변에 나오자 국군이 보였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국군에게 다가가 자신은 인민군이 아니라 국군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주먹과 욕설뿐이었다. 군번도 없고 까까머리에 카빈총, 인민군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미군 지프에 실려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등판에 큼직하게 ‘POW’(Prisoner of War, 전쟁포로)라는 글자를 새긴 옷이 입혀졌다. 

1951년 전영규는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심신이 지쳐 삶의 의욕을 잃고 굶어죽기로 작심하고 배급된 식량을 모두 남에게 주었고 3일 후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던 중 조용히 찬송소리를 들었다. 그는 찬송소리에 이끌려 수용소 안의 천막교회로 발길을 향했다. 전쟁터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싶어 그는 교회로 들어갔다. 교회 안 분위기는 수용소의 험악한 분위기와 달리 평화롭고 아늑했다.

수용소 교회의 담임은 뵐켈(H. Voelkel, 한국명 옥호열) 선교사였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인용해 설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각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지켜주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회개의 눈물을 쏟았고 한참 눈물을 쏟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조금 전까지 죽음에 대한 생각에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마음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준 하나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천막교회 안에 있는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성경공부와 성가대 활동에 열중했다. 그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구해 읽고 공부에 열중했다. 특히 역사와 영어공부에 열중했다.

한편 수용소 안에서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간의 싸움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갔다. 친공포로들은 전쟁포로들을 즉각 북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했고 반공포로들은 자유의사에 따라 남한에서 살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들이 만나면 싸움이 벌어졌고 급기야 살인으로 이어졌다. 날이 새면 시체들이 수용소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지 늘 불안했다.

1952년 4월 15일 전영규는 김원호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겪은 숱한 죽음의 고비에서 목숨을 이어온 것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후 수용소에서 친공포로들이 수용소 소장을 납치·감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용소 측의 강경한 조치로  소장이 풀려났지만 이로 인해 전영규는 광주 사월산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광주수용소도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와의 싸움이 치열했다. 그는 이곳에서 공부를 계속했는데 물감을 풀어 만든 잉크로 영어단어를 적어가며 어렵게 공부를 계속했다.
매일 천막교회를 찾아 찬송 부르고 기도했다.

어느 날, 조용히 기도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성경을 펼쳐보았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내가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라…(이사야서 43:1~3).” 그는 그동안 자신이 운이 좋고 능력이 뛰어나 그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 이제까지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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