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균의 성장과 의사의 꿈

남시균은 1924년 6월 14일(음력 5월 14일) 충남 대전의 남쪽 보문산 밑의 한적골(대사동) 16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성 남씨 희증 씨이고, 어머니는 김호준 씨인데, 아들이 다섯이며 딸이 둘인 7남매 가정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어린 유아기에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하게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학자로 마을에 보문의숙이라는 서당을 세워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가 매우 영리한 것을 안 할아버지는 그를 서당에 가게 하여 한문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그는 공부에 소질이 있어 6살에 천자문을 띄고, 7살에 아버지의 모교인 대전제일보통학교(초등과정)에 입학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곧 대전공업전수학교(중고등과정) 토목과에 진학하여 3년간 공부하였으나 1941년도에 일본이 도발한 태평양전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일제가 조선의 농산물의 공출을 하는 바람에 더이상 공부하지 못하고 18살에 대전철도국 공무과에 입사,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남시균은 철도국에 근무하면서도 상급학교에 입학하려는 꿈을 꾸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고열에 쓰러졌다. 대전도립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폐침륜과 늑막염, 그리고 늑골카리에스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병을, 그것도 세 가지나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절망에 빠져들었고 한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인생에 대해 묻게 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결국 죽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도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죽음문제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고, 머리만 아프고 통증이 매우 심해졌다. 그는 심한 고민을 거듭 하던 중 갑자기 일 년 전에 교회에 다니는 한 친구가 “예수를 믿으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고 한 말이 생각나면서 기독교 신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를 믿으면 과연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될까?” 그는 며칠 동안 기독교 신앙을 깊이 생각하다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나를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나를 위해 살지 않고, 꼭 의사가 되어 나처럼 병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많은 사람들을 꼭 살리겠습니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계속 기도하자, 그는 질병과 죽음의 맨 밑바닥에서 삶의 희망과 믿음이 솟아나 양약과 한약봉지를 버릴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그는 퇴원을 하자마자 자기에게 전도를 한 친구 호영수를 찾아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듣고 친구와 함께 교회에 갔다. 그 교회가 바로 대흥동에 있는 중앙성결교회였고, 이때부터 삶의 방향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병이 다 나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오랜 숙환인 폐결핵으로 신음하며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거의 5년 동안을 아버지의 병을 간호했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1944년 4월 18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 ! 괴롭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며 나는 결핵박멸의 굳은 결심을 한다. 나의 누나도 결핵으로 희생되었다. 나는 결핵에 도전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성한 직무다. 천부의 직을 가지고 결핵에 대한 투쟁을 할 것이다. 결핵사업을 필생의 사명으로 여기고 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1945년 1월 15일, 49세에 운명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는 다시금 결핵퇴치를 위해 반드시 의사가 되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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