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위한 성세재활원 설립

남대전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며 성세의원을 운영하던 남시균 장로는 모여드는 소아마비 환자들을 많이 진찰하고 치료하게 되었다. 날마다 병원을 찾아오는 그들을 대하면서 남시균은 마음에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때 그의 눈에 띤 것이 있었다.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는 커녕 사회에서 극히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장애인들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이러한 장애를 가지고 불우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펴주는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얼마나 장애자들을 보살피고 치료해 주셨던가.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자신의 생애를 이들 장애인들의 재활하여 그들을 사회에 복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1962년 초가을에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장애아동 7명을 데리고 숙식을 함께하며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성세 재활원’이라고 간판을 써서 걸었다. 그들의 양육비와 직원 몇 사람의 월급을 자신의 자비로 전액 충당하였다.

1963년에는 공주도립병원 내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도 성세 재활원 일을 병행하였다. 이런 가운데 성세 재활원의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입소를 희망하는 극빈층 어린이와 소아마비 어린이들이 찾아오면 그는 그냥 받았다. 그래서 원아들이 순식간에 30명으로 불어났다. 자연히 그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늘어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을 보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의 30평의 집으로는 30명을 감당할 수 없자, 그는 성세병원을 매각하기로 결단했다.

병원을 판 그는 대전 서구 월평동에 대지 1000평에 슬레이트 건물 150평을 신축하고 1965년 11월에 이사했다. 이 건물 중 절반은 재활수용시설이고 절반은 재활교육시설이었다. 이곳이 바로 대전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지체 장애 아동의 수용시설과 교육기관이었다. 장애아동 수용시설은 ‘성세 재활원’이 되었고, 교육기관은 ‘성세 재활학교’가 되었다.

충남 각지에서 모여든 소아마비 어린이들이 80명을 넘게 되었으나 당시 당국의 복지지원이 열악함으로 그의 병원 수입을 전부 털어 넣어도 유지가 어려워 경제적 부담이 아주 컸다. 이런 상황에서 당국은 그에게 법인체 구성을 요청하였다. 그는 당국의 권고대로 현 시설을 기본재산으로 하여 1965년 3월 31일, 재단법인을 구성하여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

법인구성 때문에 병원을 처분하여 집을 잃은 그의 가족들은 재활원으로 이사하여 원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원아들과 같이 구호물자인 밀가루 국수와 강냉이 죽을 먹고 살았다. ‘성세 재활학교’는 우리나라에서 1967년 서울에 있는 연세대학교 부설재활원인 ‘연세재활학교’에 이은, 문교부로부터 두 번째로 인가를 받은 지체 부자유 특수학교가 되었다.

1975년 4월 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충남도청 순시 차 대전에 들렸을 때 충남도청의 자문역인 박종만 목사(남대전교회)의 건의에 따라 갑자기 그가 운영하는 성세재활원을 방문하였다. 이때 박 대통령은 그의 노고에 감동하여 당시 3000만원에 해당하는 물리치료 기구(수욕시설)와 직업보도를 위한 기자재를 지원받도록 해주었다.

그때 3000만원은 지금으로 치면 약 5억 원 이상이 가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게 친필 휘호를 써서 남겨 주었다. “심신재활”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 휘호를 받은 남시균 장로는 자기 집무실 책상 정면에 걸었다. 그리고 휘호를 읽을 때마다 이 휘호는 그의 가슴에도 새겨진 영원한 표어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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