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남시균 장로

산에는 진달래 뜰에는 장미꽃/ 다시 찾은 봄 동산에 꽃이 피누나./
어려움 참아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보람찬 내일을 이룩해 보세/
믿음과 소망의 푯대를 들은/ 우리들의 보금자리 성세 재활원//
찬란한 아침 해 동산에 솟을 때/ 한줄기 푸른 꿈이 힘차게 자란다./
어두움 헤쳐 가는 빛나는 샛별같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세/
믿음과 소망의 푯대를 들은 / 우리들의 보금자리 성세 재활학교//

위의 가사는 성세재활원의 원가다. 1965년 9월 30일, 당시 개업하고 있던 조치원 병원에서 재활원이 있는 대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남시균 장로가 영감을 얻어 지은 것이다. 이 노랫말은 그의 사명이고 삶이었다.
성세재활원 1965년 초, 일본의 장애복지법인인 벳부의 ‘태양의 집’(나가무라 박사)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8년 4월 28일, 그는 일본 왕의 둘째 아들인 히다찌 노미야의 초청을 받게 된다. 그는 아내 박이영 권사와 남대전교회 박종만 목사, 그리고 음악 선생 1명과 아이들 10명을 대동하고 장애인들로 한민족 고유의 농악대를 구성하여 일본을 친선 방문하였다. 무용과 부채춤, 그리고 신명나는 농악을 공연하여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알리고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고자 한 것인데, 일본인들이 장애인 문화사절에 크게 놀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성세재활원을 설립한 목적을 일본어로 말했다. 이때 ‘태양의 집’ 사람들이 남시균 장로의 성재원 설립 이야기에 감명을 받아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다. ‘태양의 집’을 설립한 나가무라 씨는 “우리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지체 장애자 사업을 했는데, 그는 개인의 돈을 전부 투자하여 성재원을 건립했다”며, 그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폐결핵 박멸운동과 나병퇴치 운동과 소아마비 퇴치운동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운 얼굴로 모두가 감탄하였다.

사회복지법인 성재원의 복지사업은 그의 기도와 사명에 따라 날로 확대되어 ‘성세 재활원’과 ‘성세 재활학교’가 있고, ‘성세 재활의원’과 ‘성세 자립원’이 있으며, ‘대전광역시립 장애인 종합복지관’과 ‘성세 시온의 집’, ‘성세 체육관’, ‘성세교회’, ‘소망의 집’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험한 준령을 넘고, 망망한 바다를 건너’, ‘그날이 오기까지’와 ‘인곡 논단 추상록’ 또한 가족 문집으로는 남시균 장로와 박이영 권사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하여 자녀들이 발간한 ‘금혼 기념 문집’ 등이 있다. 그는 남대전교회의 원로장로로 교회생활에도 모범을 보였으며, 전 총회장 박종만 목사를 최고로 존경하며 멘토로 삼고 섬기며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도 힘썼다.

그는 1969년 제1회 대전 시민의 상(대전시장 이완종)을 받았고, 1970년에 건국유공 표창(대통령 박정희)을 받았다. 그리고 1980년에 국민훈장 동백장(보건의료 유공, 대통령 최귀하)을 받았으며 2003년에 국민훈장 모란장(대통령 노무현)을 추서 받았다.

성재원은 그의 뜻을 받들어 다양한 장애인 복지사업의 선진 모델로서, 우리나라의 중심 지역인 대전에서 장애인들의 삶을 향상시켜주고 희망을 키워주는 소명을 지금까지 다하고 있다. 그는 의료적으로 열악한 이 땅에 태어나 78세의 인생을 살면서 장애인들의 작은 천국과 같은 성재원을 통해 계속 일하다 2002년 5월 14일, 자택에서 소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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