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결혼한 이기웅 목사

제2차 정치보위부로 소환된 9월 27일 아침이 되자 이기웅 목사는 사모에게 “우리는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그 날을 대비해야 하오. 깨끗한 옷 한 벌만 준비해 주시오. 내가 평소에 강단에서 예배를 드리며 설교하던 그 모습 그대로 주님을 뵙고 싶소”라고 말을 했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정치보위부를 향해 갔다.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정치보위부원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기에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간 것이다.

그가 수수밭 길을 지나는데 밭 속에서 갑자기 두 청년이 뛰어나오며 말했다. “전도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정치보위부에 갑니다.”, “지금 위험한데 거기에는 왜 가십니까? 우리와 같이 여기에 숨으십시다.” 이웃 청년들은 그를 만류했다. 그때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숨는다고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말했고 청년들은 더 이상 그를 만류하지 않고 다시 수수밭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마음으로 “주여!”를 부르고 정치보위부에 들어섰다. 그를 보자 취조관이 놀랐다. 오지 않고 도망갈 줄 알았다는 것이다. 취조 중 그는 회중시계를 탐하는 담당 취조관에게 3000원을 받고 건네주었고 둘 사이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는 취조관에게 ‘교회 문을 열고 예배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 후, 통행증을 발급받고 교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사모는 그를 위해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날 밤 밤새도록 총소리가 들려오더니 아침에 인민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교회로 달려간 이기웅 전도사와 성도들은 교회의 입구 벽에 인민군이 붙인 간판을 떼어서 멀리 던져버리고, 대선성결교회 현판을 다시 걸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를 드렸다.

그는 6.25 전쟁을 치루고 삼년 째 되는 해에 부산의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으며 그는 “이제 나는 농촌 교회와 결혼한 것이다. 한 번 결혼하면 생사를 같이 하는 것이며, 어려워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1952년 1월 10일에 그는 교회 식구들과 이웃교회 성도들의 축하를 받으며 목사위임식을 했다. 그 후 그는 새벽마다 북을 메고 둥둥 치며 교회 식구들의 집 앞에서 방문하여 기도해 주고 와서 함께 새벽기도를 드렸다. 

그는 1953년 10월16일 가을날에 큰아들을 낳고 아들의 이름에 드릴 ‘헌’자를 넣어 ‘강헌’이라 짓고 강헌이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기도했다. 기도 중 그는 농촌 목회자로서의 각오와 진실을 담아 노래한 눈물 젖은 노래시를 지었는데 이 시가 2000년 1월 8일 창간된 GIPN(GLOBAL INTERCESSORY PRAYER NETWORK) 잡지에도 소개된 바 있다. 누군가 좋은 곡을 지어 불리길 기대한다.

① 신기루가 떠오른다 지평선 넘어/길도 없는 사막 길을 양을 몰아서/심한 더위 목마르고 배가 고파도/저물기 전 초원까지 가야 하리라. ② 저 빈들에 한 밤 중에 양의 목자/사나웁게 이리 떼가 아우성 쳐도/철모르는 양 무리들 잠이 들어/목자만은 이 한 밤을 새워야 한다. ③ 밤바람이 몸에 젖어 뼈가 저리고/온 세상이 흑암 속에 뒤덮여 가도/머지않아 새벽 별이 비쳐 오리니/어려워도 여명까지 참아야 한다. ④ 골안개가 그윽하다 모래 산 넘어/푸른 초장 샘물가는 복지가 있다/저 목자여 양 무리를 깨워 일으켜/어려워도 남은 길을 가야 하리라. ⑤ 험한 고개 비탈길을 넘고 또 넘어/아득하게 전개 된다 푸른 저 초원/곳곳마다 양을 위해 생수가 나니/저 목자여 이 한 날을 편히 쉬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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