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원 졸업과 결혼, 사역 시작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이종익은 매 학기 말에 학교가 주최하는 성결집회에서 성결체험을 했다. 그래서 그는 성결교회가 가장 훌륭한 교회임을 자부하면서 그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성결한 교역자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는 성서학원 생활에서 기도와 성경연구 그리고 저녁마다 동료들과 함께 자진해서 큰 거리에 나가 북을 치고 찬송하며 노방전도의 경험을 쌓았다. 교역자가 되면 노방전도를 해서 새 신자들을 모으고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1930년에 5월에 성서학원을 졸업과 동시에 동료의 소개로 만난 정숙한 조옥하 양과 학교 강당에서 신학생들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드렸다. 그리고 총회에서 경북 군위에 있는 의흥교회의 주임전도사로 임명 받아 아내와 함께 부임하여 성서학원에서 배운 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의 성실하고 성과 있는 목회사역이 인정되어 1934년에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이는 성서학원을 졸업한지 4년만이었다. 당시 목사안수는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보통 5년 이상, 심지어 어떤 사람은 10년 이상 걸리기도 했는데 그는 4년 만에 받은 것이다. 당시 목사 안수는 지방회를 관할하는 감리목사의 엄격한 평가에 따라 총회의 교학부에서 안수 여부를 결정했는데 이종익의 헌신적인 목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성실한 목회로 교회가 부흥되자, 몇 교회의 부흥회도 인도했다. 그는 특히 당시 일본의 몇몇 성결교회에서 그를 초청하여 부흥회도 인도하도록 하여 일본에 있는 성결교회 신자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이야기가 활천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종익 목사는 1935년 5월 영남지방회의 임명에 따라 군위읍교회로 전임했다. 군위교회의 지교회인 의흥교회에서 모 교회로 일종의 승진 부임한 셈이었다. 이는 그동안의 목회활동에 따른 보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군위교회가 자신이 순직해야 하는 거룩한 터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군위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열심히 일했다. 군위교회는 교회가 설립된 지 15년 동안 역대 담임교역자로 여섯 분의 전도사를 모셨지만, 목사라는 신분의 담임교역자는 처음이어서 크게 환영을 했다.

그가 군위교회에서 순직하기까지 만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사역의 특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어린이 심령의 부흥에 많은 관심을 지닌 목회자였다. 그가 군위교회의 목회 중 특히 어린이의 심령구원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 성결교회에서 좀처럼 드문 어린이 부흥집회를 해마다 개최하여 어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주일학생 수가 60명에서 2년 만에 180명으로 크게 증가되어, 군위읍의 어린이가 거의 군위성결교회에 출석할 정도였다. 그의 목회적 꿈은 어린이 심령도 구원함은 물론 어린이들을 잘 길러 교회와 민족의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미래적 안목을 지닌 탁월한 지도자였다.  

둘째로 군위교회 제1대 정진근 장로를 세워 평신도 지도자의 소중함을 안 교역자였다. 1933년 제1회 성결교회총회에서 처음으로 장로제도가 채택되었다. 군위교회는 1933년부터 지방회에 1명의 장로후보를 청원, 허락 받았으나 장립을 못하다가 이종익 목사의 부임 후, 전격적으로 정진근 장로가 1936년에 제1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는 평소 교회의 원만한 치리를 위해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의 소중함을 아는 식견과 훈련을 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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