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올림픽을 유치한 공로

그는 1977년에 장애자를 위한 적극적인 집념으로 대전시를 장애자 모델의 도시로 만들기로 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대전 시내 곳곳을 다닐 수 있도록 80곳의 보도턱을 없애는 공사를 대전시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노력이 실제적으로 결실을 맺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이동하지 못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시내 중심지로부터 외곽에 이르기 까지 보도턱을 낮추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또 그는 장애자용 공중전화 박스도 가설하도록 대전시에 촉구하여 대전 시내 곳곳에 장애자용 공중전화가 설치되었다. 이런 그의 장애인운동으로 이루어진 내용을 경향신문(1977년 9월 22일자)이 “횡단보도 휠체어 보도턱/대전시 지체부자유자들에게 감격의 선물/장애인 혼자 힘으로 건널 수 있어/84곳에 84만원 작은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싣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무엇보다 장애인을 위한 선진적 현대화를 이룬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 올림픽과 그 직후에 개최 된 장애인 올림픽이다. 특히 장애인올림픽은 우리 정부와 관계자들 뿐 아니라 온 국민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였는데 이 장애인올림픽 유치에 적극 기여한 공로자가 남시균 장로였다.

사실 우리나라는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여 훌륭히 마치도록 하는데만 힘썼고 장애인올림픽 유치는 다소 관심 밖이었다. 그만큼 올림픽을 준비하기가 크고 벅찬 일이었다. 그러자 1988년도 장애인 올림픽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최하고 싶다는 희망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정보를 그의 친구인 일본의 나까무라 박사로부터 전해 들은 남시균은 한국에서 반드시 장애인올림픽을 개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당시 대전 국회의원 남대두 씨를 찾아 한 시간 동안 설득했다.

또 총리실 행정 조정실의 소관임을 알고 나서 남대수 씨와 함께 충남지사를 지낸 바 있는 손수익 조정실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손수익 실장에게 장애인 올림픽 한국개최를 역설하였고 정부는 장애인올림픽마저 개최토록 했고, 예산 60억 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이 장애인올림픽 런던 본부에까지 전달되어 1984년 1월에 장애인 올림픽 한국개최가 최종 결정되었다.

‘88 장애인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장애인 선수들을 다양한 종목에 따라 양성해야 했다. 또 장애인 운동경기의 핵심인 장애인 농구 경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한 곳도 장애인 농구팀을 운영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태양의 집’ 농구팀을 한국에 초청하여 1984년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4박 5일 동안의 일정을 잡고 5월 12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장애자 농구 시범경기를 선보였다. 시범경기가 있은 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농구시범경기를 치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서울, 대전, 대구, 등지에서 5개 팀이 구성 되었다.

그의 노력과 헌신으로 4년 후에 열릴 장애인 올림픽을 위한 선수 발굴과 팀 창단이 각지에서 추진되어 장애인 올림픽 개최 국가로서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그는 장애인에게 있어 스포츠는 신체 재활 훈련 뿐 아니라 건전한 사고력과 장애 극복을 위한 정신력을 강화시켜 준다는 역할을 알고 성세재활원 부설로 성세 체육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